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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물려줄 마음 한 조각

다시, 역사의 쓸모를 읽고

by 뽀로미



삶은 가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차마 견딜 수 없을 만큼 차가운 현실은,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으면서.


179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하던 날, 그 곁엔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있었다. 왕세자의 아내였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남편의 죽음과 함께 모든 지위와 안정을 잃게되는데...


궁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어린 아들 산(훗날 정조)을 품에 안고 친정으로 향하던 길. 그 길 위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상마저 등을 돌린 듯한 나날 속에서,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끝내 꺾이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 피워 올린 하나의 등불인 원망을 안고도 분노에 휩쓸리지 않았던 마음. 분노는 불처럼 쉽게 번지지만, 그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건 재가 된 마음뿐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있었다.



산이가 점점 자라면서 그의 눈빛 속에 원망이 스며들 때마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고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착한 사람이 되거라.

그것이 너의 아버지께 효도하는 길이다.

복수가 아닌 선으로 아버지의 한을 풀어야 한다"라고


그녀는 아들의 분노의 불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다듬어 주었다. 억울함은 아픈 것이지만, 그 아픔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지 않게 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사랑의 방식이었다.



상처 위에 분노를 덧입히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나 역시 아이가 다치고 억울한 일을 겪을 때,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누군가 널 몰아붙이면, 절대 밀리지 말고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가라고!"

그렇게 분노는 가장 손쉬운 유산이 된다.


그러나 혜경궁 홍 씨는 다른 유산을 선택했다. 그녀는 분노를 이기는 법을 가르쳤다. 억울함을 부정하지 않되,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를 알려주었다.

아픔, 슬픔, 분노, 그 모든 감정을 품되 그 안에 잠식되지 않는 것!

그녀는 그런 식으로 아들의 마음을 묵묵하게 길러냈다.







엄마의 가르침을 품고 자라난 정조는 왕이 된 후에도 복수의 칼날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원한을 무기로 삼는 대신, 사적인 고통을 공적인 품위로 걸러냈다.

어머니가 물려준,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의 유산 덕분은 아니었을까?



아이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물려주고 있을까. 혹시 내 불안과 서운함,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조용히 아이의 등에 얹고 있는 건 아닐지..

사람은 누구나 삶에서 자신만의 어둠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어둠을 품고 어떻게 걸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일은 먼저 살아본 어른들의 몫이다. 그 몫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조용한 책임일지 모른다.


이제 나는,

분노보다는 여유 있는 품위를,

상처보다는 회복의 언어와 성장을 위한 따뜻한 시선을 물려주고 싶다.

언젠가 아이도 자기만의 어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 손끝에서 작은 빛 하나를 꺼내어 자신만의 길을 밝혀나가길,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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