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소리길 폭우 트래킹 리포트
▮나는 소위 알쓰다.
소주 4잔 정도 마시면 그걸로 끝인데, 소주보다 도수가 3배나 높은 고량주를 대여섯잔이나 들이켜고 M에게 경주를 가자, 안동을 가자 하다 골아떨어지고는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상기후로 장마가 사라졌다며 여름 가뭄을 걱정하는 뉴스가 줄을 이었는데, 마침 M을 끌어내려던 그날부터 2주간 장맛비가 시작됐다.
▮M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걸 취미로 하던 사람이다.
그의 외출에는 많은 조건이 알맞게 떨어져야 했으므로 비오는 날 산을 오른다는 무모함은 고려할 게 되지 못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경주나 돌아보고, 아니면 원래 가려던 가야산에 가자고 한 참인데, 아침에 일어나니 시간당 10mm로, 폭우가 내리고 있지 않은가.
전날 떠들던대로라면 경주를 가야했겠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대로 가야산을 강행했다.
당시 나는 모진 어떤 활동들에 중독되어 영덕 블루로드 60km를 하루에 주파하기 같은 짓을 시도하곤 했는데(물론 실패했다), 가련한 M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가자는데로 따라나섰다.
홍류동 계곡을 끼고 걷는 가야산 소리길은 왕복 2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정도라며 M에게 거짓말을 치고, 조수석에 M을 태워 가야산으로 가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빗방울이 차의 앞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M의 눈치를 자주 살피게 된다.
사실 이전에 제주도 올레길을 걷던 중 강풍에 비를 맞게 된 적이 있었는데, 보통의 트래킹보다 5배는 힘들었다. 이정도라면 족히 M을 걱정해야 할 기상 상태인데, 그때는 모든 게 좋았던 이유로 들떠 속편한 소리나 했다. 천천히 걸어갔다 오면 안힘들거라고. 배려한답시고 편의점에서 비옷이나 사면서.
결론적으로 6시간이 걸렸고, 거센 비에 우리는 정신줄을 놓았고, 좀비처럼 음식을 찾았다.
다행인 건, 이날이 장마의 첫날이라는 거다.
땅이 물기를 머금고 있지 않아, 내리는 비를 죄다 흡수한 덕에, 산길이 진흙탕이 되지는 않았다. 6월 초, 뻑뻑한 우의를 입고 있는데도 땀이 나지 않는 시원한 기온에 시간당 최소 10mm는 되는 듯한 폭우 속. 장마가 없어졌다는 이상기후를 믿고 세운 이상한 계획에서 처음의 경험이 탄생한다.
▮불만을 토로할 이유는 많다.
지난 한 달 가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비가 하필 억수같이 쏟아졌고, 산을 즐기지도 않는 사람을 무리해 데려다 놓았는데다가, 처음으로 우리 둘이 한 여행이 그랬다는 사실에는 불평을 늘어놓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M이 이 이상한 산행을 ‘재미있다.’고 해주지 않았다면, 작은 둑이 터지듯 그랬을지도 모른다.
소리길을 지나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도, 그곳을 들른 다른 멀끔한 관광객들과 달리 비바람을 뚫고 온 몰골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쳐다본다. 비닐로 된 우의 위로 빗방울이 타닥타닥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재미있다며 터덜터덜 걸어가는데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바위에 붙은 이끼에 잠깐 섰다가, 옆으로 자란 나뭇가지에 잠깐 멈췄다가, 시원해서 좋다던 빈말까지도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된 건, '재미있다'고 해준 배려덕분이라는 게 두말할 필요 없는 진실이다.
자못 이상한 데이트라 생각해도 부족하지 않았을 활동을 ‘재미있다’고 전환해버린 한 번의 상냥함은 그런 힘이 있었다.
▮장소
- 가야산 소리길 (편도 6.1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