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분홍빛 하늘은 감정의 문턱을 낮추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들을 늘어놓는 쑥스러운 대화에도 기꺼이 나아가는 젖은 마음이 들게 한다.
다만, 사담이 어설프기로는 사내 제일이던 나는어이없게도, "예쁘면 피곤하지 않아요?" 하고 묻기나 했다.
사실, 현실감각이 없어서 그랬다. 이런 순간은 상상만 했고, 상상만으로 그칠거라고믿었으니깐.
다행히 고맙게도, '선배님은 못생겨서 편하세요?"하는 세련된 대답이 돌아왔다.
8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대화에서 말문이 막히는 쪽은 거의 내쪽이었다.
꽤 오래전에 읽은 소설 [테스]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는 설정의 테스를 가슴 깊이 답답하게 여겼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이 사람은 적어도 테스처럼 휘둘리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을깨닫는 것으로, 그 사람을이미 내 울타리에 들여놓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평사원 연차였음에도, 나는 자의식이넘치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덕에 저지른 사고가 좀 많았다. 한 회의 중 다른 부서의 분석결과를 혼자서 한시간 넘게 비판하고 끝내 동의할 수 없다며 혼자 나가버린 일이라든지, 정도가 심한 클라이언트를 고소해버린 일이라든지 같은.
스스로가 정한 상식의 수준에 맞지 않는 행위에는 여과없이 대항했다.문제는,'같은 편이라 다행이야.' 같은 평가를 받던 내가,이제는인턴에게 치근덕대는 퇴사유발자가 될지도 모를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험한 건, 이상하게 자꾸 겹치는 동선에 그 사람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었다. 착각은 쉽사리 가벼운 기대를 만들었고, 매 주말이 다가올때 마다 나는 식사약속을 잡아도 되지않을까 하며 환상에 빠져들었다.
높은 상식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다지고 있던 모든 자존심에 균열이 갔다.
일상생활이 되지 않을 즈음되자,
'이직을 하자. 사유는...'
하는 고백후 도망이라는 계획까지 세웠다. 정말 그랬다면 회사 역사에 근 10년은 술안주로 회자되었겠지만,다행히 이번 서사는 내 머리속에서 그쳤다.
그리고 인턴기간을 마친 그 사람은 학교로 돌아갔고, 나는 자회사의 설립맴버로 자리를 옮겼다.
어쩌다 연락이 오기는 했지만, 1년 쯤 지난 그 때 만큼은 내가 먼저였다.
7월이 되기 전의 아직 덥지 않은 어느 한 날.
해가 조금 기울자, 무언가 작정한 듯 기분 좋게 부는 바람에 딱 알맞은 날씨가 맞춰져 퇴근 후 근처여의도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불과 두 세달 전 겨우 돋아났을 때는, 채 푸르지도 못하고 말랑하던 연한 나뭇잎들이 이제는 기특하게도 햇볕에 짙푸르게 그을리며 꼭대기 높이 서 그늘을 만들고, 그 틈 사이는 멀리 붉은빛으로 시작해 머리 위로 푸르게 이어지는 하늘이 빛나게 메운, 환상 같은 순간을 느리게 걸어나갔다.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날. 망해도 좋을 것 같았다.
굳이 얘, 누구누구 연락처가 이게 맞지? 하고 친구에게 물었다.내 의도를 알아들었는지아무것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