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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차원 Aug 01. 2024

슬픔에 붙이는 이름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심장을 다정히 감싸던 애정이 그 언저리를 따갑게 하는 때가 올겁니다. 필연적으로.

그 때는 자신의 슬픔을 아름답게 가장하거나 거짓 슬픔에 취하지 않도록 하세요.     

정말 그러한 지경에 이르기도 전에 격한 표현부터 내뱉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격렬한 감정을 담은 말을 쉽게 꺼내는 건 좋지 않습니다. 당신 없어 죽겠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것 같은 말들이 그렇습니다. 

더 격렬한 표현이 없다는 한계 때문에, 표현의 한계에 이른 감정은 안쪽으로 향하고, 오장과 육부를 뒤틀어버리거든요. 그러니 괜히 더 한 아픔의 표현에 스스로를 내몰지 마세요.


그리고요, 다른 이가 내뱉은 슬픔의 표현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일도 없어야겠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냥 갖다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타인이 쉽게 토해내는 슬픔의 표현으로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들어 그 어지러움에 잠시간 취하는 것으로는 얻을 게 없습니다. 그래서는 지독하고 긴 숙취만 남을 겁니다.     

자신의 슬픔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세요.


나도 다른 사람들이 늘여놓은 시각으로 내 것을 표현하려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도 호르몬 대사의 결과라거나 생존의 도구에 그친다는 생물학적인 관점이나, 극단적으로 우리의 사고와 감정도 물질순환의 일부일 뿐이라는 유물론적인 관점, 혹은 존재론적 시각이나 미학의 관점까지. 어떤 위대한 개념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별로 끝난 내 사랑은 얼핏 실패한 어떤 일, 혹은 시행착오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타인의 시선이 아닌 그저 사랑을 나눴던 한 명으로서의 나에게 사랑은, 그 사람이 행복해할 때, 나도 행복했던 것. 그런 정도이거든요.     

우리는 행복했으니, 지금의 이별은 사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최종 과정이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별함으로 이제 퍽 성공적인 사랑을 했던 것이라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해도 되지 않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내 것을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의 성공적인 마침이라 말입니다.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더욱이,

기억에서 자라난 연한 잎사귀 같은 추억은 도무지 마르지 않은 채, 나쁜 감정을 막아주는 기분 좋은 그늘이 되었고, 나는 그 아래서 차분하고 조용하게 미소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조금의 서운함도 없습니다.     

견딜만한 긴장감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일상에서도 온종일 이어지던 행복감. 

존재로서 서로에게 전하던 안정과 걱정 없이 사랑하기를 마다 않던 순수함이, 

슬픔 아래 사랑을 넣어 두고 잊어버리지 못하게 여전히 빛납니다. 나는 슬픔이 들어찬 모양보다는 이 빛나는 걸 이별이라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 사람에게 언젠가 그런게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낯 간지러운 사랑의 말과 다급한 애정에 떠밀린 사소한 잔소리, 마땅히 그 사람의 것인 애정의 포옹과 시원하고 끊임없는 지지의 기억들 말입니다.     

언제고 필요할 때 다시 알려줄 수 있게, 나는 그 사람과의 순간을 마땅히 지워야 할 과거로, 실패한 어떤 것의 취급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이별은 실패한 사랑의 슬픔보다, 성공적인 사랑의 마침이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더디지만,

확실히 아물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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