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야, 안녕?”
마트에서 산 샐러드 채소에 작은 달팽이가 딸려 왔다. 그 사람은 투명한 플라스틱 통 하나를 꺼내오더니 안에 샐러드 채소 몇 장을 달팽이와 함께 넣어두고는,
“집 마음에 들어?”하고 묻는데 얼굴에는 즐거운 미소로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퇴근 후의 여유 전부를 이 작은 생명체에게 붙들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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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플라스틱 통처럼, 오래된 빌라 3층은 단열이 잘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보일러 도는 소리가 쉬지 않는데도 실내 온도는 17도에서 더 오르지 못했다. 여름은 그 반대로 곤란했다.
커다란 적락운 덩어리 몇이 무겁게 하늘을 유영했음에도 얼마 전부터 비가 내리지 않는다. 옥상은 담금질한 빨간 쇠붙이 같아지고, 열기는 고스란히 집 안으로 옮겨 들어온다. 퇴근 후 에어컨을 켜기 전까지 집은 32도와 33도 사이를 오갔다.
“냉장고로 옮겨볼까?”
달팽이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출근할 때면 손수건을 감싼 얼음팩을 넣어두기도 했고, 계란 껍데기를 갈아서 뿌려줘보기도 했다. 통을 씻고, 물도 마르지 않게 뿌려줬지만 녀석은 좀처럼 기력을 차리지 못했다. 아침에 본 그 자리에 종일을 있기도 했다.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가 봐.”
작은 달팽이의 표정이라도 들여다보려는 듯, 바닥에 내려둔 플라스틱 통 앞에 바짝 엎드려 붙은 그 사람은 얼마 전부터는 저녁 내내 그 모습이다. 바이올린 연습도 하지 않고, 자고 깰 때마다 달팽이를 보살피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며칠 내내 비가 올 거란 예보가 있은 날이었다.
“비 오면 친구들 만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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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
집에서 강변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다.
빗발이 진즉 내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사람은 강변에 갈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다. 달팽이가 든 통을 두 손으로 견고하게 잡고 걸음을 달리는 그 사람에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우산으로 막으며 뒤따른다.
곧 빗줄기가 꽤나 굵어진다. 신발부터 어깨까지 점점 낮은 채도로 물들어 갔지만 그 사람의 사뭇 진지한 표정은 흐려지지 않는다. 그 분위기에 나도 포섭되어, 진지하게 달팽이를 내려다 줄 풀밭을 찾기 시작한다.
“저기가 좋겠어.”
빗방울이 그려내는 무수한 동심원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풀잎이 빼곡하게 들어차 숨기 좋은 안락한 풀숲 옆에 달팽이가 든 통을 내려놓았다. 투명한 플라스틱에 빗방울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소란스러웠지만, 부드럽게 인사하는 그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전해진다.
“팽이야, 안녕. 잘 살아. 놀러 올게.”
플라스틱 통을 조심스럽게 열어 달팽이가 올라 있는 상추를 들어 올리니 대답이라도 하는 듯 달팽이의 눈이 길게 올라왔다.
“달팽이가 상쾌한가 봐.”하니, “응.”하고 대답하면서 한 손으로 지붕을 만들어 빗방울을 막는다. 곧 두껍게 잘 자란 풀잎 하나를 골라 그 아래에 살며시 상추를 내려놓았다.
“낯선가 봐.”
달팽이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를 둘러만 보며 킁킁대고 있다. 5분 정도, 가만히 있는 모양에 발걸음을 차마 돌리지 못하다가, ‘다시 데려가야 할까.’하고 말을 꺼내려던 때에 달팽이가 천천히 풀잎 위를 미끄러져 오르기 시작했다.
“우와.”
가벼운 탄성과 함께 그 사람은 그제야 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안겨 들어온다. 그게 그렇게 좋은지 얼굴에는 즐거운 미소가 한가득이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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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3일 내내, 얇은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려주었다. 그 덕에 땅을 쓰다듬듯 얇게 불어 드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그 사람이 안심해도 좋을, 딱 맞은 날씨가 참 다행이다.
작은 달팽이를 보내었던 곳은 우리가 자주 산책하던 강변 자전거길 옆이었다. 다만, 한동안 그 길로 가지 않으려 했던 내 염려에도 불구하고 비가 그치자마자,
“우리, 팽이 보러 가자.”
하는 그 사람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산책로의 진한 풀내음이 숨결에 섞여 들어온다. 온 생명의 활동을 알리려는 듯 하는 그 향기는 기분 좋은 결말을 기대하게 했다.
‘멀리 갔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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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 뻗어난 수많은 생명 틈으로, 1센티미터 조금 더 되는 작은 달팽이의 패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내려주어 올라갔던 풀잎 아래 땅바닥에 떨어져 벌써 색이 바래버린 채이다.
‘얼마 못 갔구나.’
사실 샐러드 사이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달팽이는 바로 서지 못했다. 패각은 오른쪽으로 계속 기울었고, 몸에는 물기가 머금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2주 넘게 버틴 건,
‘너도 그 사람의 사랑이 좋았나 보구나.’
이건 다른 달팽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사람의 눈에 붉은 물기가 들어찬다. 이내 반쯤 매달려 기대 울먹거리며,
“어떡해, 팽이 죽었나바.” 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달팽이만 들여다보던 그 사람이 몰라볼 리가 없지.
“충분히 사랑해 주어서, 행복했을 거야.”
하며, 훌쩍거리는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울고 있지만, 환하던 그 미소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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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젠가 또 얼마간의 비가 온 뒤, 땅이 조금 말랐을 때 그곳을 지나게 됐다. 자전거길 위,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무언가의 흔적이 은빛으로 가늘게 빛난다.
“저게 뭔지 알아?” 하고 묻는다.
“몰라. 비가 와서 물이 흘렀나?” 하니,
얼굴 바로 앞 호흡 닿는 데까지 불쑥 들어오며 내 눈을 잠깐만에 깊이 올려다보고는,
“저거, 달팽이가 지나간 길이야.” 하면서 생긋 웃는다.
무방비의 나는 그 모습에 또 눈물 나게 반해버리고 말아 잠시 걷기를 잊었다.
그런 나를 두고 앞서 나가는 그 사람을 눈으로 따르는데, 길에 난 은빛의 선 수십 개 중 하나, 팽이가 그린 게 있을 것만 같았다.
현실에도 불구하고,
더 희망적인 무언가를 믿어 버려도 좋을 것만 같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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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달팽이가 담아간 그 사람의 애정은 기억에 붙어 있어,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시야에 놓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더 희망적인 무언가를 믿어버리는 무모함이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