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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Aug 14. 2020

또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다.

부산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애도하며.

지난번과 다른 추모의 분위기가 씁쓸하다. 똑같은 추모의 마음을 전하며, 부디 평안하시기를. © 2020 Roh.

교수님은 한 여름처럼 밝았다.

술과 운동을 좋아하시는 교수님은 주변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함께 지낸 6년 동안, 찡그리거나 화내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요 며칠 교수님의 어두운 표정은 낯설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깊은 감정을 가둘 수는 없었다.

어제는 회식자리에서 좋아하던 술도 안 마셨다.

달라진 건 며칠 전 부산에 한 장례식장을 다녀온 뒤부터였다.

의국생활을 같이 했던 친한 형님이었다며 황망해했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손에 사망한 의사의 소식은 이제 낯설지 않은 일이 되어 간다.

비정상의 일상화, 익숙해져 가는 것이 무섭다.

상처는 반복될수록 쓰리고 아프다.   

교수님은 2018년 말, 같은 일로 의국 후배를 보내고 난 뒤 두 번째이다.

지난번에도 무척 힘들어하셨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끔찍한 상실을 연이어 경험하며, 혼란스러운 심정을 토로한다.


경찰에 따르면, 고인은 긴 칼에 찔리고 베이고도 '다 죽이겠다'는 가해자를 막아섰다고 한다.

그 절명의 순간에도 고인은 주변 사람들을 생각했다.

교수님은 고인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고인의 힘겨웠던 지난날과 남겨진 가족들을 애달파했다.

함께 나눈 추억들을 말하는 눈빛에는 깊은 연민이 어려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폭력적인 환자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치료자에게 살의를 품는 환자까지 상정해 본 적은 없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정신과 의사는 위협적인 상태인지를 살피며 환자 리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도움을 요청했던 지친 영혼들을, 의혹의 눈길로 훑었다는 것만으로도 송구한 마음이다.

그럼에도 무심결에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치료자는 환자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치료자의 역할은 환자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환자의 감정을 자극해보거나, 환자의 생각을 흔들어보기도 한다.

환자의 부정적인 정서와 생각하는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치료자는 부드럽지만, 용감해야 한다.

환자를 존중해야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상황은 환자와 치료자 모두에게 손해일 수밖에 없다.


술도 안 드신 교수님은,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나를 역까지 배웅하고는 집을 향해 돌아섰다.

늘 다부진 듯 보였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인 것만 같았다.

지금의 진료 환경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교수님이 느끼는 황망함을 나는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인은 운이 나빴을 뿐, 내게는 아무 일 없을 거라 말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운을 탓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낮은 확률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

의사가 진료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나의 삶을 운에 맡겨야 하는 순간, 진료실은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간이 될 수 없다.


집으로 오는 길에 차창으로 빗물이 붙었다 점점이 스러진다.  

프루스트는 ‘사람이 태어나면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고, 죽으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고 했다.

치료하던 환자에게 의사는 죽임을 당했다.

하나의 세계를 구하려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다.

장마철 소용돌이치는 탁류 속에, 하나의 사건도 조용히 사라져 간다.


이번 일도 저마다의 일상에 치이며,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장맛비 이어지는 2020년 8월을.

15살 아들을 두고 먼저 떠난 아버지를.

아들을 가슴 깊이 묻어야 했던 늙은 어머니를.

장례식장 가는 버스에서 흘렸던 교수님의 눈물을.


"입으로나 펜으로 쓰인 문장에서 가장 슬픈 말은 ‘그렇게 했었다면’입니다."

(Of all sad words of tongue or pen , the saddest are these, 'It might have been.')

존 그린리프 휘티어 (John Greenleaf Whittier)


다시는 슬픈 말을 되뇌지 않기를 염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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