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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Sep 03. 2019

개학이 기다려지는 교사

육아보다 쉬운 수업

학부모님께, 담임 드림. 


안녕하세요? 개학 후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요. 사실 개학 바로 다음날부터 교실 생활에 너무나 익숙한 아이들을 보니 우리에게 방학이 있었던가 싶었답니다. 이제 좀 컸는지 방과후 수업도 잘 챙기고, 조금 더 자신 있어지고 편안해진 모습이에요. 


방학 동안 저희 집 3,5,7세 아이들의 존재는 저에게 '변수 그 자체'였다고 생각해요. 

여행 가서는 3살 겸손이의 잠투정으로 여행이 즐겁지가 않았고,

다녀와서는 5살 아침이의 엄마 타령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들이 많았어요. 오늘은 꼭 읽으려고 둔 책이 있는데, 갑자기 '어린이집 가기 싫어요. 엄마랑 있고 싶어요. 하루만 쉬고 싶어요.' 하면서 저를 붙잡고 늘어지는 아침이가 딱해, 하루 같이 있다가 저녁이 되면 너무 지쳐 열폭하는 식. 내 하루는 소멸돼버린 느낌, 나의 인생 자체가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느낌이었답니다. 

저는 최근 4년간 1학년 담임을 하고 있고, 또 매해 열심히 연구하다 보니 이제 교육과정도, 효율적인 교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7살인 샘물이에게 지금 이 시기에 무엇을 도와주고 자극해주면 좋을지 이론적으로 잘 알지만 다른 아이들이 치여, 내 삶을 뒤로 미루기 싫어서, 결국 샘물이와는 이렇다 싶은 시간을 못 보내는 것 같네요. 

-겸손이, 아침이, 샘물이는 모두 태명입니다. :)


게다가 집안일은 정말 왜 이렇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거예요?

적당히 하면 되고, 실제로 적당히 하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면 집보다는 카페 같은 곳에 가고 싶어요. 집이 저에게 어떤 영감과 긍정적인 기운을 주지 못하고 그저 일터로 여겨지는 것은 또 싫어 집안을 자꾸 치우고 정리하게 되네요. 그러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갑니다. 


집안일도, 육아도 없는 시간은 늘 '갑자기'생기고, 

그 시간에 좋은 생각만 하고 건설적인 일만 하면 좋겠지만,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어 결국은 울적해지더라고요. 




부장교사라 방학 때도 많은 나날 출근하며 2학기 학교 행사를 준비했어요. 또 시간을 따로 떼어 수업 연구도 열심히 했네요. (교사의 방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따갑다 보니, 열심히 연구할 때는 밴드에 책상 사진을 올리며 어필하기도 ㅎㅎ) 또 방학 후반부에 진행한 여름방학 수학캠프는, 육아로 지친 저에게 정말 힐링 그 자체였어요. 한편으론 방학 후반부다 보니 아이들의 수학 개념이 리셋되었음을 느끼며 웃음이 났어요. 덕분에 2학기 수학 수업 고민을 더 일찍 시작하며 개학 시동을 걸 수 있었고요. 


이쯤 되니 개학이 참 기다려지더라고요. 일상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아이들을 만나면 시간이 잘 가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아이들과 몇 마디 주고받고 정신없이 챙기고, 열심히 가르치다 보면 어느새 점심. 어느새 하교.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참 좋아요. 특히 수업 시간은, 교장 교감선생님도 교육청 장학사도 저를 건드릴 수 없어요. 저도 교실 밖에서 저를 찾는 요청에 응하지 않아요. 전화도 받지 않고, 전화선을 뽑아두기도 해요. 이 시간, 저와 아이들 사이에서 최상의 상호작용을 위해 집중하는, 그 몰입도 참 좋고요. 


예전에는 많은 수업을 준비해서 다 해보려고 힘을 쏟아붓곤 했는데

지금은 적당히 준비하여 여백을 즐기기도 하고

내가 게임 방법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10프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나 

어떤 아이들은 정말 배움이 더딘 것 같지만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배웠다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재밌고 좋아요. 아이들은 아직 더 파헤칠 것이 많은 무한한 연구 대상 같이 느껴져서 그 무한한 느낌도 참 좋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전,

아이들을 좋아하고 수업 시간이 좋아요. 

수업은 정말, 육아보다 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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