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아버지 이야기
B아버지 이야기_학원, 과외 없이 집에서 워킹맘 엄마와 공부하고 있는 초등 삼 남매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자라는 공부 습관> 17화
지난 글의 A아버지는 '나는 자녀 교육에 실패한 아버지다.'라고 책을 썼습니다. 자녀교육에 최선을 다한 A아버지가 느끼는 서운함과 외로움, 자녀로부터의 소외가, 같은 부모로서 참 슬프게 다가옵니다.
오늘은 B아버지의 사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A아버지가 소설가임을 밝혔던 것처럼 B아버지의 직업을 밝히자면 초등교사입니다.
B아버지는 자신의 책에 두 딸의 글을 함께 실었습니다. 판권 페이지에 보면 저자는 아버지이지만, 저작권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두 딸도 함께 가집니다. B아버지는 스스로 '나는 성공한 아버지다.'라고 쓰지 않았지만, 자녀들이 성장 과정에서 쓴 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B아버지를 성공한 아버지로 보는 점들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모든 인용문은 제가 임의로 편집, 강조하였습니다.)
"샘이 있어요. 아주 좋은 물이 나와요. 몸에 좋은 약수, 생수가 솟아 나와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돼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물이라 해도 물이 흘러가는 파이프가 썩으면 썩은 물이 나와요. 샘에 있는 진짜 좋은 물이 흘러가면서 오염되지요. 엄마는 딸을 아껴요. 사랑하죠. 그 사랑을 잔소리로 표현하면 어떨까요? 자녀는 잔소리라는 파이프를 거쳐 흘러나온 물을 썩은 물로 느껴요. 잔소리를 듣는 자녀에겐 샘(엄마 마음)이 보이지 않아요. 말만 들리죠. 자녀는 이 파이프를 통해 흘러나온 물을 마시지 않아요. 부모의 사랑이 전해지려면 파이프가 좋아야 해요." (274쪽)
잔소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와 딸에게 B아버지가 교사로서 해 준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아이에게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면 아이가 받아들일까요? 부모가 입 노릇을 잘한다고 아이가 잘 자라는 게 아니에요. 귀 노릇도 잘해야 해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 분명해서 상대가 듣지 않으면 마음을 닫아 버려요. 자녀가 부모에게 기대를 접고 귀를 닫으면 부모와 자녀 모두 불행해요. 부모는 자녀가 고민을 말하는 상대가 되어야 해요. (275쪽)
혹시 B아버지의 딸들은 완벽한 아이들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B선생님은 화낼 일이 없는 자녀를 키우신 거 아닐까요? 이어질 인용문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B아버지의 딸 이름이 민하, 서진임을 밝힙니다. B아버지는 독서교육전문가로 독서와 관련된 책을 몇 권이나 출간한 초등교사 겸 작가입니다.
민하는 책 읽는 태도가 독특해요. 책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며 읽어요. 민하가 한 권을 계속 읽으면 다른 책도 읽어보라 말하긴 했지만 강요하진 않았어요. 마음속으로는 셀 수 없이 강요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어요. 민하는 민하 나름의 방식이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도 처음에는 몇 번이나 읽으라고 꼬드겨도 안 읽었는데 답답한 마음을 참고 참으며 기다렸더니 나중에는 읽고 또 읽었어요.
민하가 대학생이 돼서 말해요.
"아빠, 제가 아빠한테 정말 고마운 게 있는데 뭔지 알아요?"
"뭐야?"
"저를 기다려 준 거요. 아빠는 저를 기다려 줬어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기다리면서 얼마나 답답했는데,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면 민하가 마음 아플까 봐 아닌 척하며 꿀꺽 삼켰는데, 참으면서 기다리길 정말 잘했다고 느꼈어요.
서진이가 고등학생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아빠 말은 들을 가치가 있어. 잘 들어야지!"
민하와 서진이는 사춘기 때도, 수능 준비할 때도, 대학생이 되어서도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어요. 서진이가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취업 준비 스트레스로 힘들어한 적이 있어요. 시험에 떨어질 것 같고, 백수로 지낼 것 같다고 해요. 한 마디 해 달래요. 그래서 "불안을 미리 당겨 쓰지 말아라!" 했더니 '우와!' 하며 좋아해요. 이 말을 들으니 불안이 사라진대요. 그리고 "힘들 때 아빠에게 전화할 테니 불안을 미리 당겨 쓰지 말라고 해주세요!"라고 하네요. 그러고는 불안을 당겨 쓰지 말라는 말이 어쩌고 하며 엄마에게 말해요. 서진이는 이 문장을 생각하며 불안을 이겨낼 거예요. 저도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여요. 아이들이 한 말이 제 마음에 가득 차기 때문이에요. (101~102쪽)
B아버지의 딸인 민하와 서진이는 성향이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민하는 과묵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아이였습니다.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서진이는 일단 말하면서 정리하는 성향입니다. 하루 종일 종알거렸다고 합니다.
수능 시험 일주일 전, 민하가 수능 보기 싫다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고 너무 답답했어요. 공부하라고 닦달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수능을 안 본다니요! 벌컥 화를 낼 상황이에요. 수능을 안 보겠다는 말은 의지의 표현일까요, 감정의 표현일까요? 이미 결정하고 말하는 의지가 아니라 답답하다는 감정의 표현이에요. 인생을 단 한 번의 시험에 맡겨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나고 불만인 거예요. 고 3으로 살아가는 자체가 갑갑해요. 감옥에 갇힌 것 같아요. 부모가 수능이 중요하다고 말할수록 자녀는 불안이 커져요. 자녀가 마음으로 말할 때는 부모도 마음으로 들어야 해요. 그래서 수능 안 봐도 된다고 했어요. 대학 안 가도 된다고, 아빠랑 글 쓰자고 말했어요.
"공부 별로 안 하고 편히 쉬면서 학교 다녔는데...."
"다른 애들에 비하면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이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민하는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학교 다니기 싫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도 1년 쉬어도 좋다고 했어요. 친구들과 같은 줄에 서서 같이 뛰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오래 사는 시대가 되었으니 천천히 공부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마음으로는 '휴학하지 말고 친구들과 같이 졸업해라, 제발.' 하며 빌었어요. 아이에게 천천히 공부해도 된다고 말하면서 나 자신을 설득했어요. 아이가 아니라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랐어요.
자녀가 사춘기를 겪으면 부모가 태도를 바꾸어야 해요. 사춘기는 부모의 안내와 설명이 잔소리로 들리는 시기예요. 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사춘기 자녀는 부모 말을 듣기 싫어해요. 부모의 조언과 충고가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형편없다."라는 말로 들려요. 사춘기 땐 그냥 그래요.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아이를 늦게 낳으면서 자녀의 사춘기와 부모의 갱년기가 겹치게 되었어요. 부모도 힘들고 짜증이 늘어난 상황에서 자녀가 말을 듣지 않으면 벌컥 분노가 치솟아요.
민하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뒤에 이렇게 말했어요.
"아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휴학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때 왜 휴학 안 하고 계속 다녔는지 알아요? 아빠가 휴학해도 된다고 해서 계속 다닐 마음이 생겼어요. 그때 휴학하지 말라고 했으면 정말 다니기 싫었을 거예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중고등학생은 모두 힘들어요. 내신 등급, 모의고사 등급으로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잖아요. 끔찍해요. 등급 낮은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안하고, 등급 높은 아이는 등급이 떨어질 것 같고 실수할 것 같아서 불안해요. 선생님들은 계속 수능 성적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압박해요. 점점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초조해져요. 그런 걸 견디는 아이에게 버럭 화내면 저에 대한 믿음을 잃을 거예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부모를 믿지 못하는 자녀라니요!
휴학하겠다는 딸에게 그러라고 했을 때도 사실 벌컥 튀어나오는 말을 참았던 거예요. 그때뿐만이 아니에요. 아이에게 하려던 말을 삼킬 때가 여러 번이었어요. 아이에게 한 마디 하려고 나섰다가 얼굴 보고 말을 삼킨 적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말하는 게 과연 지혜로운 행동일까 생각하고는 참았어요.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자니 힘들었어요. 답답할 때면 혼자 산을 걸었어요. 한참 시간이 지나 화가 가라앉으면 아이가 하는 말에 담긴 마음이 보였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 마음이 느껴지며 화 안 내기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버럭'과 '벌컥'을 잘 삼키게 됐지요. 제가 아이를 기르며 잘한 걸 꼽으라면 벌컥 튀어나오려는 말을 끝까지 삼킨 거예요. 아이를 불안하게 하는 말을 삼킨 것만으로도 좋은 아빠가 됐어요. 아이가 책과 글을 좋아하도록 안내한 것도 좋지만 아빠를 믿고 고민과 불안을 이야기하는 관계를 유지한 게 더 좋아요.
말은 씨앗이에요. 한 번 말하면 비슷한 말이 줄줄이 딸려 나와요. 화를 내면 계속 내게 되고, 한 번 참으면 또 참게 돼요. 제가 참지 않고 덜컥 말했다면 '너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말을 끝없이 해대는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그럼 아이는 '전 부모가 말하는 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하겠지요. (275~279쪽)
부모와 자녀 관계를 망가뜨리며 점수에 매달리지 마세요. 아이를 닦달했다면 이른바 명문대라 부르는 대학에 진학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랬다면 자녀가 힘들 때 저를 찾지 않았을 거예요. 목소리 듣고 싶어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253쪽)
저는 B아버지와 함께 교사 모임을 여러 번 했습니다. 비록 B아버지가 사는 지역이 달라서 모임의 단위가 커질 때만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았기 때문에 B아버지가 판타지나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임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B아버지는 자타 공인 책벌레입니다. 책과 글에 대한 책을 많이 내셨습니다. B아버지의 책을 많이 읽었고, 교사로서의 모습도 독서가의 모습도 닮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 이만큼 길게 쓰신 책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교사로서의 B아버지가 쓰신 글과는 결이 다른 감동과 울컥함으로 이번 책을 읽었습니다.
A아버지가 자녀에게 한 잔소리는 결코 (★잔소리를 하는 사람 시점에서는)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시간 지키기, 앉을 때 바른 자세로 앉기, 음식 남기지 않고 먹기,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기, 책상 위를 항상 깨끗하게 하기 같은 것들이었죠. 부모로서 이 정도 잔소리도 못하나요!?
하지만 B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담긴 생수와 같은 부모의 사랑을 아이들은 전혀 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A아버지도 과거를 반추하며 '잔소리가 아니라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라고 알려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A아버지는 자녀가 대학생활 하는 것을 보고, 대학생들이 너무 안이하게 공부한다는 내용의 비판글을 신문에 기고하여 자녀들에게 큰 원망을 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후회도 잔소리와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녀에게 잔소리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덧붙여, B아버지의 이야기가 담긴 원본을 추천합니다. 권일한 선생님의 『제대로 독서 진짜 공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