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비워낸 계획 위에 채워진 행복

by 온결

이번 주말은 아내 기말고사 준비 전, 우리 가족에게 허락된 마지막 휴식 기간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쉬는 날이라, 우리는 신정시장에 가서 칼국수를 먹기로 했다. 앞서 시간은 있었지만, 딸이 깁스를 한 상태라 시장을 걸어 다닐 수 없어서 가지 못했다. 이렇게 가족이 함께 쉬는 날이 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나는 이 귀한 주말을 활용해 미뤄왔던 등산을 가기로 마음먹고 산행 계획서를 작성했다. 천상중학교에서 문수산 폭포를 거쳐 휴게소까지 약 3시간 30분 거리의 코스였다. 인터넷에서 지형도를 찾아 우리 집에서 휴게소까지 나오는 지도를 출력했다. 각 위치를 정하고 자로 줄을 그은 뒤, 산행 계획서에 휴식을 취할 지점의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 기록했다.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은 아침 7시에 출발하면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하는 ‘해피 엔딩’ 계획이었다. 산행 계획서에 휴식 지점과 시간을 기록하고, 폭포 앞에서 아침 겸 먹을 라면과 밥 한 덩이를 상상하며, 나는 소풍 가기 전 초등학생처럼 설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전 10시 30분까지 문수산 휴게소에 도착하면, 아내는 차를 타고 와서 함께 칼국수를 먹으면 된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주말이라 아내와 딸은 9시가 넘어 일어날 것이므로, 나 혼자 등산을 즐길 수 있었다.


내일 아침 온도가 3도라 산 정상 온도는 영하권으로 내려갈 것이라 예상했다. 정상에서의 날씨를 고려해 여벌의 두꺼운 옷과 갈아입을 내의, 그리고 T셔츠까지 준비했다. 그 외 올라가면서 먹을 간식거리와, 가장 중요한 폭포에서 아침 겸 먹을 “라면에 밥 한 덩이”도 준비했다. 크~~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물론 가족이 모두 함께라면 좋겠지만, 아내와 딸은 도시 여자들이라 빌딩이 있는 숲에서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함께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서로 원하는 방식으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딸은 늦잠을 자고, 나는 혼자만의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점심이 되면 가족이 모두 모여 맛있는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정원이 있는 근사한 카페에 들어가 아내는 봐야 할 책을 보고, 딸은 게임을 하고, 나는 오늘 걸은 코스를 지도에 그려 보며 서로 원하는 방식으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이보다 좋은 주말은 없을 것이다.


어릴 적 학교에서 소풍 가기 전날 밤 설레어 잠을 못 자던 초등학생처럼,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너무 기대된다.


이번 산행에서 문수사 절에 잠시 들러 아내에게 줄 약수를 담아 올 계획이었다. 결혼 13년 만에 얻은 딸의 출생을 점지해 주신 그곳 주지 스님께 10년 만에 감사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다. 나와 아내는 불교를 믿지 않지만,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인연으로 얼굴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스님께서 좋은 날을 점지해 주셨다. 그 때문인지 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특별한 잔병 없이 잘 자라고 있다. 작년에 독감으로 입원한 적이 있지만, 그전까지 입원이나 링거, 주사 한 번 맞은 적이 없었다. 딸이 태어난 이후부터 우리 가족이 하는 일이 모두 잘 되었다. 몸이 약한 아내 또한 딸을 출산할 때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아주 고마운 분이 있는 곳이다.


딸을 출산한 후에도 제대로 인사 한 번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있었다가 10년 만에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번엔 문수산에 들러 부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로 산행 코스 중 하나로 정했다. 혹시 부처님께 감사 인사와 함께 부탁드리면, 아내의 병도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사심도 있었다. 왠지 그곳에서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약수 물을 받아 아내가 마시면 아내의 병이 모두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내 계획은 저녁이 되자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내는 “같이 점심 먹기로 한 날 가야 해”라며 싫은 소리를 냈다. 아내는 약속 장소로 가려면 집에서 혼자 딸을 챙겨 나와야 하고, 계획보다 5분이라도 일찍 나가야 하는 상황이 싫었던 것이다. 숙제하고 있는 딸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나는 잘 안다. 여기서 무턱대고 화를 내면 내일 등산은 무산된다. 일단 화를 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계획을 잠시 수정해야 했다.


나는 즉시 지도를 꺼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루트를 찾아보았다. 그렇게 3시간 30분 코스는 2시간으로 대폭 줄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최종 수정된 코스는 전망대에서 시작해 정상까지 올라간 후, 하산 길에 문수사 절에 들러 약수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다.


새벽 7시, 나는 차를 몰아 전망대로 이동했다. 아쉽게도 라면은 포기하고,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김밥 두 줄과 계란 세 개를 샀다. 짧은 코스였지만 오랜만의 등산이라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르는 내내 햇살과 발에 밟히는 낙엽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듯했다.


온도가 0도라 산은 더 추울 거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날씨가 포근했다. 오르다 더워 잠바를 벗어 배낭에 넣기 위해 잠시 내려놓았는데, 하필 그때 식사 거리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잡을 틈도 없이 삼각김밥과 계란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어. 어. 어’ 하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계란은 절벽 아래 계단에 떨어져 겨우 건졌고, 삼각김밥은 찾을 수 없었다. 아침은 반 토막이 되었고, ‘집에서 라면을 가져올 걸…’ 하며 한숨을 쉬었다. 옷을 넣는 행동조차 부족함을 한탄하며 등산을 계속했다.


어느덧 8시 30분, 산 정상에 올랐다. 배낭을 내려놓고 김밥과 계란을 꺼내 먹으며 GPS와 함께 아내에게 사진을 보냈다. 정상에서 먹는 김밥은 맛있었지만, 양이 적어 아쉬웠다. 객기는 아무 데서나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허기를 채우고 하산 길에 문수사 절을 향했다. 내려가면서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일부러 밟았던 낙엽도, 내려갈 땐 미끄러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절에 도착해 GPS로 위치를 확인하고 아내에게 보낸 뒤, 부처님 앞에 섰다. 부처님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반쯤 감은 눈으로 온화하게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공손히 세 번 절하고, 딸이 건강하게 태어나 잘 자라게 해 주신 것에 대한 10년 만의 감사를 전했다. 아내의 병과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드렸다. 시주 몇 만 원과 인사 몇 번에, 너무나 많은 부탁을 드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아시는지, 부처님은 여전히 온화한 모습으로 웃으며 받아주셨다.


기분 좋게 절을 나와, 아내와 딸에게 줄 약수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시간에 도착했고, 우리는 시장에 가서 칼국수를 먹고 잠시 시장을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온 시장이라 장 구경도 하고, 나는 아래로, 딸과 아내는 우리가 자주 먹는 호떡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호떡을 먹은 뒤, 아내와 나는 연애 시절 자주 오던 떡볶이 집에 들러 순대를 먹으며 딸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그래” 하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시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엔 카페에 가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려 했으나, 아내가 할 일이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제 계획한 대로 모든 일정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낸 날이었다.


산에서는 등산 내내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길을 잃을까 하는 걱정 없이 오롯이 혼자 등산을 즐겼다. 갑작스럽게 코스를 변경했지만 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시장에서는 따로 계획한 나만의 비밀 계획도 실행했다. 아내는 모른다. 오늘 등산과 카페가기 등이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오롯이 혼자 길을 걸으며 얻은 평온함과 가족과 함께한 소소한 시간들 덕분에, 오늘도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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