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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벼리 Sep 05. 2024

친정에 발길을 끊었다

소설 [이상한 목공방 1]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제 이야기는 아이고요.^^


 아주 어릴 적에는 할머니와 작은아버지 내외까지 한집에서 살았다. 작은 아버지 가족이 먼저 독립을 하고 다음으로 우리 가족이 독립을 했다. 말이 독립이지 셋방을 하나 얻어 나가 살게 된 것뿐이다. 그 독립에서 나는 제외되었다. 엄마 아빠는 맞벌이로 바쁜데 네 살의 어린 딸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할머니 집에 맡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엄마 아빠의 셋방은 걸어서 10분 거리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혼자 노는 것이 지겨웠다. 엄마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대책 없이 길을 나섰다.


 길을 걸으며 혹시 엄마와 마주치지 않을까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며 걸었다. 걷다 보니 살던 동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주치는 얼굴들은 죄다 모르는 얼굴들 뿐이었다. 길을 잃었다.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엄마를 찾지 못할 까봐 두려웠고 혼자가 될까 봐 무서워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경찰차가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나는 경찰 아저씨 품에 안겨 파출소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 보게 되었다. 엄마가 올 때까지는 경찰 아저씨의 품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기로 했다. 아저씨는 총각이라고 했다. 아이를 다룰 줄 몰라 안절부절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코알라 새끼처럼 품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별 수 없이 총각 경찰 아저씨는 밤새 나를 돌봐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아저씨 품에서 잠들었다. 아저씨는 곤히 잠든 내가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혔다. 아직 깊이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나를 눕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꽤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소파였지만 할머니 집에서 자는 것보다 백배는 더 편했다.


 할머니는 네 살의 손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캄캄한 밤에도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 담배를 사 와야 했다. 겨우 네 살의 어린 여자아이에게 야밤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손녀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할머니였으니 평소에 살갑게 대했을 리도 없다.

 네 살이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모든 일에 '싫어'부터 외치고 보는 나이가 아닌가. 할머니가 싫었던 나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등짝이나 엉덩짝을 때렸다. 야밤에 담배 심부름을 다닐 정도면 할머니의 주장대로 징그럽게 말을 안 들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조금만 말대꾸를 하면

"조그만 년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지랄이야! 저 년은 지 어미를 닮아서 버르장머리가 없어!"

싫다는 말을 하면

"아이고! 이 년이! 지 아비를 닮아서 고집까지 세네!"

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잊지 않고 꽉 쥔 주먹으로 머리를 비틀어 세게 쥐어박았다.

나는 할머니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핏줄을 닮았다는 이유로 죄가 많은 년이었다.


 할머니는 좁은 방 안에서 문을 꼭꼭 닫고 담배를 피웠다. 새벽잠이 없었던 노인네는 일찍부터 일어나 온 방 안을 담배연기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뿌연 연기가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아침이면 목이 잠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손녀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는 양반이 건강 따위를 걱정할 리 없다.

그런 할머니 집보다 파출소 소파가 편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아침이 되자 엄마 아빠가 파출소로 찾아왔다. 미아가 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할머니 집으로 가야 했다. 엄마는 자주 오겠다는 약속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거리가 지척인데 어린 자식을 떼어 놓고 주말에 한 번 와 보지도 않는 엄마였다. 약속한 밤이 한참 지나도록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나는 또 엄마를 찾아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 몇 번 오갔던 기억을 더듬어 용케도 엄마 아빠의 셋방을 찾아냈다.

엄마는 길을 잃지 않고 찾아온 것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던지 나를 격하게 반겨 주었다. 너무 행복했다.  엄마 아빠가 있는 곳까지 혼자 찾아갈 수 있어서 좋았고, 갑자기 찾아온 나를 혼내지 않고 반겨주니 더욱 좋았다.

 다음날도 나를 셋방을 찾아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다음 날도 아무도 없었다. 부실한 나무 미닫이문에 자물쇠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마루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 아빠는 오지 않았다.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구멍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언제나 그렇듯 할머니는 내가 없어진 줄도 몰랐다.


 지금도 길을 잃고 엄마를 찾아 헤매는 새끼고양이를 보면 어릴 적 엄마를 찾아 헤매던 서러움과 공포가 밀려온다. 그러니 나는 또 새끼 고양이가 안쓰러워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몇 년 뒤 엄마 아빠는 셋방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나도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열 살 때부터 내게 집안일을 시켰다. 아무리 똘똘하다고 해도 열 살이 어른들 하는 일을 따라 해 봤자 얼마나 잘할 수 있겠는가. 야무지지 못한 손으로 하는 빨래가 깨끗할 리 없었고, 구석구석 열심히 비질을 해도 먼지는 그대로였다. 열심히 돕고 있는데도 엄마는 돕지 않는다며 혼을 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윽박질렀다.

 사소한 집안일은 물론이고 먼 거리까지 오가는 아빠 반찬 배달 심부름도 해야 했다. 엄마는 동네 여인네들에게 화장품 방문 판매를 했는데 외상값을 받아오는 일은 전부 내 몫이었다. 지겹도록 달동네 가파른 골목을 오르내리며 외상값을 받으러 다녔다.

 엄마가 집에 없을 때는 일곱 살 많은 오빠가 장남답게 엄마를 대신해 내게 명령을 하고 구박을 했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폭력성과 지질함을 두루 갖춘 오빠는 어린 여동생에게 가차 없이 주먹을 날렸다.




 엄마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를 다닌다더니 나까지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교회 사람들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다정한 말하기 대회라도 하는 듯 달콤한 말들만 골라서 엄마 귀에 쏙쏙 집어넣었다. 상대를 칭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남편과 자식까지 칭찬을 했다. 그들이 말하는 가족관계는 이상 그 자체였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엄마는 대책 없이 빨려 들어갔다.

우리 집의 풍경은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족들이 살면서 어떻게 서로 불만 하나 없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지? 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부정적이고 냉정했던 시각 덕분에 나는 머지않아 그들의 가식을 알아챌 수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칭찬을 가장한 자기 자랑이기도 했다.

엄마는 그들을 마냥 부러워했다. 그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말 잘 듣는 똑똑한 자녀들과 걱정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바람은 현실과 달랐다.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꾸기에는 차이가 너무 컸다. 엄마의 공허함은 갈수록 커져만 갔고 갈급하고 가난한 영혼이 되어 증인의 삶에 더욱 집착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맹목적인 신도가 되어갔다.


 여호와증인들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도, 결혼기념일도, 제사도. 그리고 생일 까지도 모두 우상숭배라고 말을 한다. 이것저것 우상숭배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참 많은 종교다.


 나는 엄마랑 살면서 생일 축하를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내 생일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가는 것까지도 허락받지 못했다. 왜 내 생일을 축하해 주지 않느냐고 딱 한번 대든 적이 있었다. 한 번쯤은 나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일 축하를 받고 싶었다. 나의 존재를 기뻐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었다.

평소에 워낙 욕을 많이 들어놔서 어릴 적부터 웬만한 욕으로는 멘틀이 나가지 않는 강인함을 지닌 나였지만 생일을 입 밖으로 꺼냈던 그날은 달랐다. 웬만해서 듣기 힘든 상스러운 욕들이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엄마는 내게 마귀 같은 년이라고도 했다.


 부모에게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삼 남매를 골고루 예뻐하지 않았던 엄마였다. 그런 사람이 또 남들에게 자식 자랑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내게 성경을 외우라고 강요했다. 교회는 순순히 따라갔어도 성경까지 외우고 싶지는 않았다. 성경을 외우지 않는다고 나는 또 욕을 먹었다.

"꼴 보기 싫은 년!"

"말도 더럽게 안 듣는 나쁜 년!"

"지 아비를 닮아서 고집만 센 년!"

나는 그렇게 다채로운 년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술에 취해 널브러질 때면

"저놈에 지긋지긋한 나 씨 집안 종자들 때문에 내가 살 수가 없어!"

라고 우리를 세트로 묶어서 욕을 했다. 확실히 엄마의 삶은 증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렇게 증인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가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원통해했다.


 엄마는 시골의 가난한 집안 여덟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마을에 홍역이 돌았다. 엄마를 포함한 두 아들이 홍역에 걸렸다. 아들이 귀하던 시절이 아닌가. 외할머니는 홍역에 걸린 두 아들이 죽을까 봐 극진히 보살폈다. 두껍고 따뜻한 솜이불에 돌돌 말아 두 아들을 끌어안고 정성을 다했다. 딸은 죽어도 상관없다며 차디 찬 바닥에 방치했다. 극진한 대우를 받던 두 아들은 열병으로 죽었고 차디찬 바닥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은 죽기 않고 살아났다. 셋째 아들도 홍역에 걸렸고 겨우 살아났지만 청력을 읽었다.

엄마는 막내 남동생을 업어 키웠다. 그러니 애정도 남달랐을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안쓰러운 동생을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에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빠를 만났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남자에게 눈이 먼 순간 간호사의 꿈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엄마는 아빠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인사를 갔다. 할머니는 엄마를 보자마자 큰며느리가 왔다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엄청난 환대에 덜컥 결혼을 결심하고 그날로 눌러앉아 살기 시작했다.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할머니는 애도 생겼는데 이제 자기가 어디를 가겠느냐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은 아버지는 청년시절에 한 때 놀음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가 그때였다. 작은 아버지는 돈을 다 털리고 할머니의 돈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돈이 자꾸 없어지자 할머니는 엄마를 의심했다. 우리 집에 도둑년이 들어왔다며 만삭의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경찰서로 향했다. 도둑년으로 몰려 머리채를 잡히고 맨발로 경찰서까지 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남편이라는 인간은 자기 어머니 말만 듣고 허리띠를 풀러 만삭의 임산부를 때렸다.


 엄마는 그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 일로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할머니만 보면 치를 떨었다. '지긋지긋한 나 씨 집안의 종자들'이라는 묶음에는 나 씨가 아닌 할머니까지도 한 세트였던 것이다.


 엄마에게 자식들은 족쇄와 같은 존재였다.

"너희들 때문에 나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아직도 살고 있네."

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불쌍했다. 사춘기가 되자 엄마의 무거운 짐 보다는 '그러면 내가 태어난 것이 죄인가?'라는 생각이 나를 붙들고 흔들었다.


 부모의 대학 지원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일찍부터 사는 방법을 깨달은 나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나이가 되자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엄마를 닮지 않을 수 있을까? 절대로 닮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부모와 다르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은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먼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받지 못한 것들을 아이에게 줄 수는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참에 아이 없이 홀가분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엄마의 나이보다 이미 내 나이가 더 많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이기적이었던 엄마의 태도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엄마의 삶이 평생 외롭고 힘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안쓰럽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기가 겪었던 아픔을 최소한 자식에게는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노력 정도는 했어야 했다.

염병할! 자식들을 그렇게 키울 거였으면 차라리 낳지를 말던가!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 나는 나 어릴 적에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느냐며 엄마에게 따져 물었다.

"야! 이 계집애야! 너는 언제 적 일을 가지고 그러니?

아이고! 참 나! 웃기지도 않네!

아니! 너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서 그러니? 생각할수록 열불이 나네?

뼈 빠지게 벌어서 먹이고 입혀서 키워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엄마가 그 지랄 맞은 시엄니 시집살이를 해가면서 어떻게 살았는데!

아빠는 또 어떻고!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아는 년이.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 이 썩을 년아!"

엄마는 백발이 다 되어서도 사과는커녕 도리어 화만 낸다.

나는 친정에 발길을 끓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내가 괘씸하다며 찾지 않았다.



작가의 말---
제가 경험한 어린 시절과 겹치는 부분들이 많아 몰입해서 썼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의외로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많이 안아 주었죠.

너무 많이 안아주어서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엊그제는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술 취한 남편보다 더 취한 사람처럼 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혼할 뻔했네 소중한 너를.. - 2부" 에피소드 매거진을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
참고로 언제 올릴지는 모릅니다. ^^ )
https://brunch.co.kr/magazine/onbyeori-essa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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