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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예술 1

나를 사랑하게 해주는 단 한 가지

by 히피 지망생

* '비움의 기술(https://brunch.co.kr/@hanvit1102/20)'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가끔 사람들과 술 한 잔 하고 헤어질 때면 일부러라도 집에 걸어오고는 한다. 사람들은 택시 타고 가라 하지만, 술 마시고 집에 걸어오는 시간은,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술기운으로 몽롱해진 기분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평범한 일상 -차가 지나다니고, 신호등이 깜빡이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이런 일상적인 일들- 이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걷다 보면 다양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일상 속에 있으면 일상적인 생각만 하게 되지만, 걷다 보면 눈앞을 스치는 장면들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그 위로 다양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가 ‘생각을 걷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걷다 보면 생각 위를 걷게 되니까.



생각 위를 걷다가 생각 거리가 떨어지면 늘 닿게 되는 종착지가 있다.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됐나?’ 이 질문은 늘 답이 없고, 그래서 늘 생각의 종착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나답게 살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지나온 길을 되밟는 시간은 분명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물론 그 시간이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힘들어하던 나 자신을 보고 안쓰러워질 때도 있고, 어린 날의 치기가 부끄러워 자다가도 이불킥 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애써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가끔 후회되는 순간들은 그때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툭툭 털고 가면 되지만, 그때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됐음을 깨달을 때는 무력감에 젖기도 한다.


그때의 나를 사랑하게 해주는 단 한 가지


그래도 가끔 과거의 나에게서 마음에 드는 구석을 발견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순간들은 내 삶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래서 소중하다.

그때의 나를 사랑하게 해 주는 한 가지.

‘그래도 그때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잠시 어린 시절로 테이프를 돌려야 할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새 신발을 신은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친구들이 신고식이라며 새 신발을 밟아대도 씨익 웃어 보이는 것이 그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께서 새 신발이나 새 옷을 사 오실 때마다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 가난한 친구들이 나의 새 신발, 좋은 옷을 보면 부러워하고 가난한 자기 집을 탓할 텐데, 가난한 친구들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더랬다. 하여 일부러 신발을 더럽혀서 새 신발이 아닌 것처럼 학교에 신고 가고는 했다. 훗날 어느 책에선가 나와 비슷한 경험담을 써놓은 작가가 있어 유심히 봤는데, 다른 생각도 나와 비슷해서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생각의 결이 비슷하면 삶의 결도 비슷해지는 걸까.


초등학교 3학년, 우리 반에는 차림이 남루하여 유난히 가난해 보이는 친구가 둘 있었다. 그 친구들은 오락실을 좋아했다. 어린 마음에 그 친구들을 도울 방법으로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오락실에서 돈을 대신 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이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못된 듯, 못된 것 아닌, 못된 것 같은’ 일에 손을 대게 됐다.


당시 우리 집은 사정상 잠시 미용실을 경영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서 현금을 어디 보관하는지 알고 있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내일 입을 바지 주머니에 현금 2천 원을 넣고 돌아왔다. 다음 날 오락실에 가면 그 친구들에게 천 원씩 주고는 마음껏 오락하라 하고 나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 친구들은 고맙다며 나보고 같이 하자고 했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게임에는 흥미가 없어서 나는 보기만 했다. 신기한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더란 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친구들은 차림만 남루할 뿐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중 한 명은 갈빗집 아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보다 훨씬 잘 사는 집이었던 것 같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은 덤으로 얻게 됐다.




초등학교 6학년, 서울로 첫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유난히 또렷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중, 지하철 연결 통로의 문이 열리더니 한 청년이 들어왔다. 청년은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유심히 지켜보는데, 청년이 갑자기 상의를 걷어 배를 보여줬다. 배에는 튜브가 달려있었다.


청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제가 지금 병에 걸려서 몸에 튜브를 끼고 영양을 공급받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치료비가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술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면 은혜를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청년이 나눠준 종이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천 원을 주시면서 종이랑 같이 주라고 하셨다.


그 청년이 내가 타고 있던 지하철 객실에서 걷은 돈은 2천 원에 불과했다. 지하철 안에 있던 그 많은 사람 중 돈을 건넨 사람이 단 둘 뿐이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서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일 때문인지 중학생이 되면서 신문기자로 꿈이 바뀌었다. 주위만 둘러보아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사회에는 비리와 탐욕이 넘쳐났다. 비리를 저질러 공익을 해치는 사람들을 사회에 고발하여 감옥으로 보내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안 될까?

이것이 ‘어린 마음’에 신문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였다.



나는 왜 약자에 약할까


약자에 대한 감정이입은 내 삶 전체를 관통해 지금도 나의 행동을 지배한다.


일례로, 우리 집 가전제품은 모두 LG 제품을 쓴다. 삼성에 밀려 2등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LG가 언젠가는 삼성을 이겨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삼성의 실체를 알게 된 후부터는 더 격하게 '우리 집 삼성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핸드폰마저 LG 폰으로 갈아타면서 모든 가전제품의 LG화를 실현했다. 사람들의 LG 폰에 대한 평가는 악평 일색이지만, 난 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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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일단 시작하면 책 한 권을 더 써야 할 것 같아서 이만 줄인다.

삼성의 실체가 궁금한 이들에게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보길 바란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법무팀에서 일하면서 불법 비자금, 편법 자금 운영 등 사람들이 모르는 삼성의 이면을 마주하고 회사를 나와 내부고발 서적 『삼성을 생각한다』를 펴냈다. 이후 사회의 응원은커녕 배신자라는 따가운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고, 책 광고도 어떤 이유에선지 언론사들로부터 거부당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삼성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생각하면 그 이유는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책 광고의 카피는 다음과 같다.

“이건희 회장보다는 삼성이, 삼성보다는 대한민국이 중요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고 가르쳤다.” (어디까지나 삼성보다는 LG의 기업윤리가 그나마 낫다는 얘기지, LG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2만 광년 정도 멀리 떨어져 있다. LG야 잘하자, 쫌!!)


음원 사이트는 멜론을 쓰다가 멜론이 음원 서비스 시장에서 1위 독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니로 갈아탔다. 지니가 2등 업체답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요금 할인도 많이 해줘서 기분 좋게 잘 쓰고 있다.


빵집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빵집을 이용해주고 싶은데, 이젠 동네 빵집을 찾기가 힘든 실정이다. 대기업이 제빵 업계에까지 발을 들이민 후로 동네 빵집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 중국집, 초등학교 앞 분식점에까지 대기업 자본이 침투되는 건 아닌지.


스포츠 경기에서도 언제나 약자 편이다.

프로야구는 응원하면 보살이라는 소리를 듣는 한화 팬이다. 다른 스포츠도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는 한 약팀을 응원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약한 팀을 응원하면 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망할 때가 많지만, 이겼을 때는 훨씬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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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따로 좋아하는 팀이 있으면 그 팀을 응원한다. FC 바르셀로나의 팬이 된 이유도 비슷하다. 지금은 세계적인 강팀이지만, 오랜 세월 카스티야로부터 핍박받았던 카탈루냐의 역사적 아픔을 축구로라도 치유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FC 바르셀로나를 응원해왔다.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끝까지 대항한 곳이 바르셀로나이다) 나중에 유니세프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는 점, 상업주의에 맞서 시민들의 협동조합으로 팀이 운영된다는 점을 알고 나서 FC 바르셀로나의 열렬한 팬이 됐다.


돌이켜보면 집에서 어려운 사람들 도우면서 살라고 특별히 교육받으면서 커온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지금도 거리의 부랑자들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할까? 그 사람들이 실제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일까 의심하면서도 돈을 줘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란 것이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면 유전적 기질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내 삶의 정체성이 아닐까?


이는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살고 싶은 대로 살려고 태어났다'는 앞에서의 결론이 존재 이유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답이라면, 왜 하필 여기에 다른 사람들과 섞이게 됐는지 사회적 차원에서의 답을 찾고 싶었다.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라고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닐까?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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