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사팀 팀장이라 주기적으로 블라인드 앱(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에 접속해서 직원들의 동향을 살핀다. 직원들이 직접 인사팀을 찾아와 이야기하는 상황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을 잘 안다. 이런 경우 블라인드는 직원들의 민낯 혹은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창구가 되기도 한다. 내 옆자리의 직원일 수도 있는 그 누군가는, 익명의 특수성을 십분 활용하여 마음속의 말을 온라인상에 마구 품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블라인드 회사 익명 게시판의 내용은 아래 네 가지 정도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회사의 복리후생 및 급여에 대한 불만
'다른 회사는 A 혜택이 있는데 우리 회사는 없어요', '새로 변경된 복리후생 제도가 다른 회사에 비해 수준이 낮아요', '예전 제도가 더 좋았는데 점점 복지가 안 좋은 쪽으로 변해요.' 등등의 복리후생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급여 인상이 높지 않거나 동결되었을 경우에는 급여에 대한 이야기가 급증한다. '이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 내 연봉이 이 정도인데, 적절하게 받는 거 맞나요?' 등등 익명의 탈을 쓰고 공개해서는 안될 개인의 급여 수준까지 논의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승진이나급여 인상이 컸던 직원의 경우 이런 게시판에 아예 글을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쁜 경우의 일들이 계속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된다.
이 주제의 타깃은 인사팀이다. 인사팀이 복리후생이나 급여의 개선을 위해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볼맨 목소리가 가득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복리후생이나 급여는 아무리 좋아도 절대로 직원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2.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
회사는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발견된 사건에 대해서는 회사가 철저하게 조사하고 징계를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일도 참 많은 것 같다. '유부남이 싱글 여직원에게 치근덕거렸다', '회식자리에서 나쁜 손이 보였다' 등 성희롱 관련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어떤 매니저는 아래 직원의 프로젝트를 자기 것처럼 보고를 했다', '회의시간에 막말을 해서 면박을 줬다', '주말에도 시도 때도 없이 업무 지시를 한다' 등등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이야기도 많다. 그럴 때도 역시 화살은 인사팀으로 향한다. 인사팀은 회사편이라 직원을 위한 제대로 된 조사와 징계를 하지 않는다며 몰아세운다. 인사팀에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이 안 되니 블라인드에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가끔 억울하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사건의 조사와 징계는 철저한 보안아래 이루어진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소문이 나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때가 많다. 그래서 전체 내용을 모른 채 일부만으로 전체 사건이 평가되기도 한다. 결국 왜곡된 이야기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안타까운 점은, 회사에 공식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이거나, 피해/가해자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익명 제보의 글 만으로는 공식 조사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3. 각종 유언비어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는 이야기들이다. 어떻게 나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커뮤니티 상에서는 유언비어가 기정 사실화 되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인사평가 항목에 대한 잘못된 정보나, 임원들의 사생활 등 소설을 써도 이보다는 잘 썼을 것 같은 각종 유언비어들이 떠돈다. 그런 잘못된 정보에는 엄청난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한 번은 나도 그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내가 팀원을 다 내쫓고 혼자 권력을 독식하고 있다나?? 깜짝 놀랐다. 사실은 당시 팀원들이 개인적인 고민과 글로벌 인사 조직의 문제로 자발적으로 퇴사했다. 나 역시 당시 회사를 떠나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많은 고민 끝에 이직의 기회를 마다하고 책임감 하나로 새로 팀을 꾸렸는데, 이게 웬 말인가. 며칠 동안 싱숭생숭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연예인들이 왜 악플에 고통을 받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4. 사장님의 무능함
사장님이 무능하다는 전제 하에, 조직 운영이나 회사의 방향등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진행하는 새로운 사업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수익 구조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혁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조직 문화를 이상하게 이끈다' 등등의 이야기이다.
일부 통찰력 있는 이야기들도 있어서, 임원 미팅 때 현실화 가능성 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이 거칠어지면, 사장님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장횽 잘 좀 하자!', ' 사장횽 요즘 일 안 하는 것 같아..' 등의 귀여움 섞인 불평은 어느 정도 웃고 넘어갈 수 있다. (익명 게시판에서 상대방을 지칭할 때 남녀/지위고가 상관없이 '형'을 '횽'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횽, 죽지 않을 만큼 패줄 거야', '능력도 없는 놈이 사장으로 앉아 있다' 등 인신공격적인 거친 발언이 등장하면 깜짝 놀란다.
며칠 전 남편은 남편회사의 블라인드에 자신을 공격하는 글이 올라왔다고 이야기했다.
안그래도 요즘 남편 회사 주가가 많이 떨어진 탓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였다. 아마도 회사에 개인 투자를 한 직원이 불만을 많이 품었던 모양이다.
우리 회사 블라인드에 사장님을 욕하는 글이 올라왔을 때에는 그것이 그냥 '사장의 무게'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내 남편이 사장님으로서 공격당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회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직원들의 복리후생을 더 챙겨주려고 노력하고, 직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늘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지켜봐 왔기에, 직원들의 무차별 인신공격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회사의 불만을 '사장님'의 이름에 쏟아붓는 것은 이해하지만, 인신공격은 제발 자제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