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이던 나는
남동생이 낮잠을 자던
오후 세 시마다
마당에 나와 미친 듯이 울었다.
이유는 몰랐다.
다만, 그 울음이 세상에 들려야 할
어떤 신호 같았다.
마치 어둠 속의 늑대가
“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외로움의 울음처럼.
그 울음은 오랜 기억 속에서도 또렷했다.
아니, 엄마가 각인시켜 준 그 기억은
엄마에게 외치는 절규였다.
엄마, 엄마 나 좀 사랑해 달라고.
그 울음은 외로움의 첫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아이는 자라서
중학생이 되던 어느 날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태어나는 순간
“또 딸이야.”
부모의 절망 섞인 한숨은
나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래서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울음으로, 노력으로, 그리고 효도로.
그렇게 ‘나는 누구인가’에 집착했고
그 집착은 결국 나를 가두는 껍질이 되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름표를 붙인다.
둘째 딸, 누나, 친구, 부모, 직장인...
이름표들은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이름표 속의
‘나’는 언제나 고정된 존재일까?
그 안의 ‘나’는 정말 변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름표를 모두 떼어내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00이다’라는 말로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
그 정의는 나를 설명하면서도
나를 제한한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존재란 무엇일까.
있을 존(存), 있을 재(在)
‘있음’이다.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있음’이다.
존재는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 있음으로 충분하다.
그 모든 이름표를 떼어내면
그 안에는 하나의 생명체가 있다.
울음으로 자신을 알리던
외로움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려 했던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생명체.
그것이 바로 ‘나’이다.
그저 지금, 여기 있음으로 충분하다.
숨 쉬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있음(存在)’으로 머무는 연습
오늘 하루,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그저 ‘있음(存在)’으로
머물러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