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탐구의 끝은 바로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번 상담에서 선생님의 요청은 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례 가족 소개를 할 때, 부모님의 안부를 말하고 형제자매가 몇인지를 말하고는 한다. 나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부모님께서 건강히 계시고 위로는 3살 터울의 형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가족은 꽤 화목한 편입니다.
지금도 나는 우리 가족이 꽤 화목한 편이라 생각한다. 굳이 꽤라고 붙인 이유는 많은 매체에서 보아온 화목한 가정과는 조금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상도 부모님과 아들 둘인 집안이 모두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가족은 서로에 대한 애정표현이나 가벼운 스킨십이 매우 드문 편이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는 표현을 내가 부모님이나 형에게 말로 해본 적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 같다. 지금 하라고 해도 뭐랄까, 간질거림이 등 뒤로 타고 오르는 기분에 말이 올라오다 목 끝에서 턱 하고 걸리는 것만 같다. (형에게는 절대 할 생각이 없다.) 대신에 나는 편지로 표현하는 것을 선택했다. 30대가 넘은 지금은 편지를 언제 써드렸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20대에 서울 생활을 했을 때는 간간히 편지를 써드렸다. 그 편지 끝에는 말로는 못할 사랑한다는 표현을 꼭 의무처럼 붙여 쓰고는 했다. 그렇게라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알 수 없는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무탈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굳이 하나만 뽑으라면 그건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이 아닐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원인 모를 부채감과는 별개로 나는 딱히 효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집에 전화를 1~2주에 한 번이나 드리려나? 바쁠 때는 먼저 전화 올 때까지 연락드리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겨우 내가 다짐해서 하는 것은 1년에 정해진 횟수에 의무적으로 집에 가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다. 또 가끔 챙겨 주시는 음식이나 물건을 거절하지 않고 감사하게 받는 것. 그저 괜스레 호들갑을 떨면서 넙죽 받을 뿐이다. 챙겨 주시는 일 자체가 어느덧 다 커버린 아들에게 부모님께서 해줄 수 있는 몇 안 남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경상도 남자다. 여러 매체에서 만들어진 경상도 중년의 이미지와 비교해 보면, 어느 부분은 비슷하기도 하고 어떤 면은 꽤나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표현은 정제되어 있고, 적당히 가부장적인 면이 있으시지만, 장난도 많으시고 호탕하게 잘 웃으시기도 하신다. 아버지는 평생을 블루칼라로써 2교대, 3교대 근무를 하면서 가정을 일구셨다. 젊으실 때는 그러한 근무 형태 때문에 약주를 상당히 즐기셨는데, 은퇴한 지금까지도 즐기시는 것 보면 그냥 술을 좋아하시는 거다. 그놈의 술이 뭔지 우리 어릴 때는 어머니를 꽤나 골치 썩이기도 하셨다. 두 분이 언성을 높이며 크게 싸우셨던 기억은 거의 없지만, 어릴 적 술에 취한 아버지와 고함과 어머니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번 어릴 적의 슬픈 일을 떠올릴 때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해 뒤늦게 상담 선생님께 말씀드린 내용이기도 하다. 그때는 왜 이 일을 떠올리지 못 했을까?
가족으로 시야를 확장해보니 떠오르는 일들이 이것저것 많아진다.
나는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아버지도 평범한 한 가장일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에 뛰어든 후부터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근면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는 아버지보다 키도 훌쩍 자라 버린 막내아들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세상 가장 존경스러운 남자이다.
어머니도 경상도 여자이다. 경생도 아지매만키로 억척스럽고 강한 이미지보다는 소녀스러운 감성이 더욱 도드라지는 편이시다. 아름답고 이쁘고 멋진 것을 좋아하신다. 멋진 풍경, 이쁜 꽃, 편안한 분위기까지 내 성향의 많은 부분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는지도 모른다. 형제가 있는 집의 전형적인 모습일 텐데 나는 딸아들 역할을 하는 막내였다. 어머니와 시시콜콜한 주변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내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집 떠나 독립한 아들이 뭐 하고 사는지 얼마나 궁금하실까. 사실 우리 부모님은 꼬치꼬치 캐묻는 편보다는 지긋이 기다려주시는 편이다 보니 나는 집에서 꽤나 말이 많은 편이다. 형은 정반대라 부모님 속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머니에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안함이 있다. 세 남자 사이에서 내가 공감해 주기 어려울 외로움들이 분명 많았을 것이다. 딸아들 역할을 한다고는 하였지만, 실제 딸만큼이나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줄 수 있었겠는가. 중년 여성의 갱년기가 있다는 것도 이미 그 힘든 시간이 끝나고서야 깨달았으니 참 무심한 세 남자임에 틀림없다. 나는 어머니의 성향을 많이 닮았음에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형은 뭐 그냥 형이다. 우리 형. 그 말로도 충분히 설명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형은 덩치가 꽤나 크다. 어릴 적부터 동생 밥 다 뺏어 먹냐는 농담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심심찮으면 듣고는 하였다. 한 번은 내 중학교 졸업식에 머리를 밀고 온 적이 있었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머리까지 밀어놓고, 고등학교 교복 넥타이까지 해놓고 보니 이건 뭐 영락없는 조폭이 따로 없었다. 공부 머리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순수한 면이 있어서 그 위압적인 외향에도 엄한 길로 한 번 안 빠진 게 용하기도 하고, 동생으로써 고맙기도 하고. 물론 어릴 때는 덩치 차이가 워낙 많이 나기에 괴롭힘도 적당히 당하고 어린 시전 내내 억눌려 산 기억이 많지만 말이다.
대게 많은 형제들이 그러하듯 형과의 관계도 애정 속에 데면데면하다. 별 소식 없으면 그냥저냥 큰 일 없이 잘 지내는가 보다 싶다. 대게 형의 소식은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듣고는 한다. 그리고는 보통 비슷한 말로 통화가 끝나는데, 네 형에게 뭐 하고 사는지 연락 한 번 좀 해보라는 것이다. 또 말은 잘 듣는 편이라 무심하게 '뭐 하셔?' 한 마디 카톡을 던지고는 하였다.
나 : 뭐 하셔? 잘 지내심? 형 : 그냥 있지. 나 : 그려 알겠슈. 잘 지내셔. 형 : ㅇㅇ
대한민국 여느 평범한 형제의 카톡 대화였다.
나는 집에서 전형적인 착한 아들이었다. 특별히 속 썩인 적도 없고, 부모님 말에 잘 순응했으며, 공부도 곧 잘했으며, 심심하면 이런저런 자그마한 글쓰기 상을 타오기도 하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재잘재잘 이야기도 곧 잘했으니, 말도 없고 공부에 영 관심이 없던 형과는 영 반대였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거절도 잘 못하고, 속으로는 스트레스 받아하는게 딱 전형적인 착한 아이 증후군의 범주에 있었다.
이런 무난한 성장 과정의 사람들이 착한 아이 증후군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 두 가지 큰 기질적 특징이 있다고 한다. 바로 공감능력과 민감함이었다. 여기서 민감함은 눈치 혹은 예민함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성향은 사람은 눈치가 좋은 편이다. 나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민감하게 느끼고 빠르게 알아차리기도 한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타인의 기쁨이나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에 쉽게 공감을 하고 편안하게 느낀다. 반대로 보자면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견디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기에 나를 위해서 남이 기쁘고 즐거울 행동을 한다. 그 과정에서 받는 내적인 모순과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이 불편한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가족을 이해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었다. 가족이란 작은 공동체는 내가 생애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하나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많은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나의 가족들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만으로 내 현재 모습과의 연관성들이 드러나고 또 새로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가족들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 나와 그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상담 선생님의 질문은 한 문장에 불과했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