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내 상담 앞 시간에는 어린 여자 아이가 아동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10살이나 되었을까? 초등학교는 들어가긴 했을까? 싶은 조그마한 여자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상담실에서 나오기도 하고, 상담을 마치는 시간에 아버님께서 상담실로 마중을 오시기도 하였다. 밖에서는 방 안에서 상담하는 소리가 조금은 들리는데, 상담 선생님께서 여러 번을 질문하고 반복적으로 물어봐야지만 겨우 아이의 한 마디를 작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상담 때마다 이 어린아이를 스쳐 지나갈 때면 괜스레 마음이 쿡쿡거렸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티 없이 신나게 뛰어놀 나이에 벌써 마음에 묻은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걸까. 나는 저 나이에 뭐 하고 있었을까. 생각 없이 놀이터를 뛰어놀았을 것 같은데. 마음이 마른 진흙마냥 착잡해졌다. 같은 상담실 후배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얼른 문제가 나아지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지난 첫 상담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내 이상(異常)상태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당일 상담 선생님께서 던져주신 탐구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어릴 적에 기억에 남게 슬펐거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나요?
웬만한 질문에는 곧 잘 대답을 하던 나였는데, 이 질문에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마땅히 떠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흐름상 내 어릴 적에 뭔가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었는데, 딱히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꽤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도 생각해 보고 저리도 생각해 보았다. 그럼에도 뭔가 지금의 내 상태를 설명해 줄 만한 그러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쥐어짜 내려고 해 봐도 없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설마! 나도 모르는, 어떠한 트라우마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걸까? 있을 리가 있겠냐.
나는 평소에도 상당히 굴곡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부족함 없이 자랐고, 원만한 대인관계에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공부도 어느 정도 곧 잘하는 편이었고, 예체능에도 빛나는 재능은 없었을지언정 바닥을 보인 적은 없다 느꼈다. 인생에 감사한 기억과 추억도 많았고, 현재도 원하는 분야에서 좋은 사람들과 만족하며 일하고 있다. 때론 인생에서 작은 성취도 가져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물론 부족한 것들도 많겠지만, 꽤 축복받은 감사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난 내 마음이 힘들다는 것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는지도 모른다. 대체 왜? 뭐가 부족하고, 뭐가 힘들게 있어서 마음이 고장 난 것일까? 스스로 아무리 되물어봐도 결론은 결국 내가 문제라는 것에 도달했다. 그렇게 내가 부족하고 문제가 있다는 결론밖에 낼 수 없어 더욱더 괴로워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프고 힘든 순간을 겪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내 말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쳐갔다.
나는 너처럼 순탄하고 평범하게 자라지 못했어. 내 어릴 적, 내 과거는 상처로 가득해. 나는 그 순간들을 잊어본 적이 없어. 아니, 잊을 수가 없어! 나는 어릴 적 큰 아픔으로 지금까지 괴로운데, 너는 마음이 힘들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어!
네가 대체 왜 힘들다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네가 무슨 상담이야? 괜히 엄살 피는 거 아냐? 아니면, 주변 관심을 끌고 싶어서라 던 지. 요새 패션 우울증이란 단어도 있던데, 그거 아냐?
맞아,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나는 아주 멀쩡하고 정상적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내 조건은 슬픔, 우울, 불안과는 꽤나 멀기 때문이다. 또, 주변에는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든 것을 밖으로 내색하고 말하는 법을 꽤 오래전에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픔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아픔을 서서 마주하기도 버거운데 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 속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를 얼마나 더 깊은 구덩이로 던져놓고 있는 것일까. 그 어둠 속에 끝은 과연 있는 것일까. 왜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걸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현재의 아픔이 나의 어린 시절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나는 사랑받고 축복받으며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왔다. 부모님의 자랑이며, 형의 부끄럽지 않은 동생기도 하고, 가까운 이들의 소중한 친구이며, 사랑이기도 하다. 어느 이가 전심으로 갈구할 무언가를 내가 넘치게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며, 다른 이가 너무나 부러워할 환경을 내가 겪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아픔이 누군가의 더 큰 괴로움과 슬픔에 위로를 받아야 할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온 시간과 가진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면 족할 일이었다.
어찌 보면 현재 나의 문제는 보다 가까이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푸념 아닌 푸념을 푸는 동안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이것이 상담의 갖는 힘이구나. 상담(相談)의 사전적 의미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서로 의논함.'이다. 상담선생님께서 화두를 던지시면 그에 대해 고민하고 답하면서 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기도 하고, 잊고 있던 것을 더듬어 기억해내기도 한다.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기도 하거나, 또 다른 질문으로 깊숙이 이어지기도 한다. 두서없이 쏟아낸 나의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께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주시면, 나는 다시 그 내용을 보며 스스로를 이해해 간다. 이러한 상호 작용이 이뤄지는 과정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궁금증을 풀기 위한다는 상담의 목적이 충실히 수행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결과 나는 오늘 어린 시절을 탐색하면서 내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감사함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나 상처를 겪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성인기에 우울증이 발병할 확률이 8~10배 정도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께서는 요새는 특별히 성장기의 아픔이 없는 성인 우울증도 많다고 한다. 이는 과거보다는 관대해진 우울에 대한 시선과 분위기로 인해 숨겨왔던 아픔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일수도 있고, 기질적으로 우울에 취약한 성향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때문에 아직은 좀 더 나에 대한 이해와 탐구가 필요한 단계였다.
이제 내 이상과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의 초입에 들어섰다. 신중하게, 하지만 때론 과감하게 한 발씩 내디뎌야 했다. 자기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때론 두렵고, 괴로운 일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드집어 꺼내야 할 때도 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사실을 피하지 않고 마주 서야 하기도 한다. 미지의 것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하나씩 헤쳐 나가는 지금.
나는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