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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란한뼘 Jun 14. 2024

객관적 검사로 나를 이해하기 (MMPI & TCI)

마치 서늘한 날에 베인 듯이 쓰라렸다. 

초반부 심리상담은 나의 과거와 주변을 더듬는 과정이었다. 내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찾는 첫 발걸음이기도 했다. 내 무난한 과거나 나의 가족에게서 기인한 문제는 특별히 찾을 수가 없었는데,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인가를 탓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가지고 누렸던 것들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금 찾을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좋은 출발이었다.


간혹 나는 이 과정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들과 같다고도 느꼈다. 더듬더듬 만져지는 것을 묘사하고 나름대로 설명하지만, 누군가는 다리를 만지면서 기둥이라 생각하고, 상아를 만져본 이는 큰 뿔이요, 머리를 만져본 이는 바위요, 코를 만져본 이는 절굿공이 같다고 하였다. 이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는 고사성어는 원래 사물을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잘못 판단하는 것을 비꼬아하는 말이나, 묘사 자체는 문제를 탐색하고 이해하는 과정과 비슷해 보였다.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스스로 탐색할 때, 시기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부분을 되짚어보게 된다. 이때 보통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기반하여 문제를 바라보는데, 이 경우 주관적인 판단이 훨씬 더 많이 개입되어 왜곡되거나 편향될 수 있다. 특히나 과거를 돌이켜보거나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는 경우는 더욱 그러할 수 있다. 나에게 속하고 가까운 부분에 대해서는 중력장처럼 더욱 심하게 요동치고 곡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보다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봐야 할 때가 되었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심리상담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두 가지 심리검사를 추천해 주셨다. 바로 MMPI TCI였다.


MMPI는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Minnesota Multiphasic Personality Inventory)의 준말로 1943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병원의 Hathaway와 McKinley에 의해 개발되었다. 해당 검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MMPI는 양과 다양성의 측면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연구가 수행되어 왔으며, 개인의 성격 특성 및 정신병리적 상태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검사로 발전하였습니다. 현재는 진단 및 상담뿐 아니라 학교, 인사선발 및 관리, 교정이나 법정 장면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 출처 : (주)마음사랑


심리검사 링크를 전달받고 집에서 노트북으로 검사를 진행하였는데, 검사 문항은 총 567개나 되기에 검사시간은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검사 시작 전 질문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느낌 가는 대로 선택하려 했는데, 질문 수도 너무 많고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뒤로 갈수록 자동으로 본능에 따라 답변을 고르게 되었다. 비슷한 형태의 질문이 뉘앙스만 바뀌어서 반복적으로 나오다 보니 한 두 번 다른 방향의 답변을 고르게 되더라도, 결국에는 한 방향의 답변으로 빠르게 수렴하였다. 검사의 신뢰도를 위해 많은 문항이 필요한 것이었겠지만 한 시간 넘게 집중하여 검사를 진행하는 것은 상당히 지치는 일이었다.


다음은 TCI였다. TCI는 기질 및 성격 검사(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의 준말로, 성격 및 기질 검사를 이르는 말이다. 해당 검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TCI는 C.R.Cloninger의 심리생물학적 인성모델에 기초하여 개발된 검사입니다. TCI는 기존의 다른 인성검사들과 달리, 한 개인의 기질과 성격을 구분하여 측정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기질과 성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TCI를 통해서 한 개인의 사고방식, 감정양식, 행동패턴, 대인관계 양상, 선호 경향 등을 폭넓고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출처 : (주)마음사랑


이 또한 심리검사 링크를 통해 집에서 노트북으로 수행하였다. 검사 문항은 총 140문항으로 약 20분이 안 되게 검사를 끝마쳤다. 이미 MMPI를 하느라 꽤 지쳐있던 터라 보다 신속하게 검사를 진행하였다. 보편적 인성 상태를 검사하는 MMPI는 다르게 TCI는 한 개인의 기질(선천적)과 성격(후천적)을 구분하여 객관적 지표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검사 후 다음 방문한 심리상담 때 받게 된 결과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우선 MMIP 결과는 는 2-7 코드가 나왔는데, 해당 코드의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 책임감 있는, 생각이 많은, 체계적인, 정중한, 착실한, 권위를 존중함, 신중하고, 사려 깊음

- 2-7 코드 타입은 불안 및 우울감을 반영함 ⇒ 우울, 불안하고 긴장되어 있으며 걱정이 많고 예민하다.

- 과도하게 책임지는/진지한

- 과도한 걱정/강박

-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위협에 취약하며 사소한 자극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음

- 정서적으로 쉽게 불안정해짐.

- 완벽주의 성향으로 결정장애 가능성이 높고, 자기에 대한 기준이 높음.

- 성취욕구가 강하여 성취로 인정받고자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이 부족함.

- 자기 체벌적, 비관적으로 상대에 대한 공격적 성향이 매우 낮음.

- 수동의존적 패턴으로 타인에게 지나치게 맞춰주려는 경향성이 많음.


TCI 결과로 나오는 기질/성격 유형 코드에는 제각각 별칭이 붙는데 내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기질(HHL) : Explosive (폭발적인) / Borderline (경계선)  ⇒ 충동성, 자기 파괴적 행동

- 성격(LHM) : 복종적인 ⇒ 수치스러운, 관대, 패배, 자기주장 X, 위험회피기질이 높음.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설명해 주신 현재 내 상태 혹은 이대로 있다면 처하게 될 상황은 꽤나 섬뜩하게 느껴졌다.


우울장애, 불안장애, 강박장애


장애란 표현은 여러 의미를 갖지만, 여기에서는 '신체 기관이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를 뜻할 것 같다. 정신 능력의 결함이라니 조금은 의기소침해지기도 하였다. 장애라는 단어를 굳이 제외하더라도 '우울', '불안', '강박'은 내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객관적 검사를 통해 마주하게 된 현실은 마치 서늘한 날에 베인 듯이 쓰라렸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신기하기도 하였다. 내가 혼자 진단하고 추측했던 상태들이 명확한 표현과 정의로 정리되어 쏙쏙 이해가 되었다. 예전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순서는 바로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라 그렇게도 많이 생각했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매우 건방진 생각이었다. 충분은커녕 나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부족해 바닥이 보이는 샘과도 같았다. 


검사 결과에 공감하는 만큼 속내가 샅샅이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 속 깊이 숨겨놨던 내 비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손으로 한 칸씩 여는 듯만 같았다. 물론 내 앞에는 상담 선생님만 계셨지만 말이다. 물론 당장 내가 장애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인지는 전문의의 상담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하셨다. 이 결과는 현재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기에 참고는 하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의연한 척 표정은 관리했지만, 검사 결과에 대해 상당히 놀랐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에 묻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법정에서 무언가를 선고받은 기분도 들고, 의사에게 불치의 병명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임금님은 당나귀귀라고 대나무 숲 땅굴에 외쳤던 것처럼 마음속 깊이 묻어만 놓았던 비밀들이 어딘가 해방되어서일까, 다소 후련하기도 하였다.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과거를 되돌아봤고, 내 가장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공신력과 객관성을 가진 검사를 통해 내 현재 상태를 들어다 보기도 하였다. 더디지만 꾸준히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서 저녁놀 아래 파도와 같이 슬픔이 밀려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상태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는 시점에서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짙은 안갯속에서 길의 흔적을 찾은 듯했지만, 그 끝에서 다시 길을 잃은 혼란스러움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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