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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란한뼘 Jun 17. 2024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이 한 문장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이 한 문장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MMPI와 TCI 결과로 나타난 나의 현재 상태와 타고난 기질은 어찌 보면 단순 명확했다. 기질적인 불안과 예민함이 불러오는 강박과 우울.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의 근원은 바로 불안이었던 것이다. 상담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등 뒤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찌릿함을 잊을 수 없다. 그동안 오랜 시간 홀로 고민하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설명되었다. 생각해 볼수록 꽤나 명쾌한 설명이었다.


나는 불안했다. 불안의 대상은 대개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오랜 연인과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오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직장에서 사방팔방에서 밀려들어오는 업무와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에 과연 끝이 있긴 한 것일까 하는 불안. 오늘도 이렇게 힘든데 내일은 얼마나 더 힘들 까에 대한 불안. 나란 사람에 대해 깊게 고민할수록 명확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흐려지기만 하는 스스로에 대한 불안. 내가 좋은 사람일까, 좋은 친구일까, 좋은 동료일까, 좋은 자식일까에서 오는 불안. 수많은 불안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불안은 고로에서 갓 부어져 시뻘건 불길을 내뿜는 쇳물과도 같았다. 이러한 이미지는 아버지가 제철소 현장에서 오래 일을 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의 작업 현장을 견학 간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무섭도록 무겁게 깔려있는 뜨거운 공기 속에 시뻘건 쇳물들이 뿜어내는 수증기들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그 공간의 냄새, 소리, 색깔은 성인이 다 된 지금까지도 너무나 인상적인 것이었다. 고로에서 막 나온 쇳물과 같이 나의 불안은 쉽게 식지 않는다. 물을 아무리 끼얹고 바람을 씌어봐도 그 깊은 속내에 있는 열기는 여전하여, 작은 자극에도 쉽게 다시 달아오르곤 했다. 현재와 미래에 불확실성은 기본적으로 불안하고 예민한 나에게 좋은 땔감이었다.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왜 내가 왜 강박적으로 시간단위로 하루를 계획하고, 물건을 배치하고, 여러 루틴들을 설계하는지. 왜 주기적으로 우울이 극에 달할 때마다 모든 생활이 모래로 쌓은 성과 같이 와르르 주저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그러고 나면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이어지는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겨우 유지를 했던 거였는지. 불안을 감추기 위해 허겁지겁 쌓던 성벽들은 내 속을 손쉽게 감춰주었지만, 너무나 허술하여 작은 충격에도 금이가고, 작은 실금이 발생한 순간 순식간에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결국 강박은 내 불안을 감추기 위한 잘못된 방법이 야기한 결과였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너무나도 불편해했다. 모든 것이 예상하는 범위 내에 있기를 원했다. 특히 갑작스럽게 생기는 약속이나 회식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거기다 거절은 잘하지도 못해서 표정관리 한 껏 하여 생글거리는 얼굴로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미 나에게는 계획된 하루가 있는데, 여기에 돌발변수가 생기는 것은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온전해야 할 내 하루가 망가지는 것만 같았다. 일정이 빽빽이 들어선 내 다이어리를 동그라미로 완성시켜야 하는데, 한 번 어긋난 계획은 다시 쳐다보기도 싫어지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 열심히 써오던 다이어리를 며칠이고 열어보지도 않고 방치해두곤 했다. 그러다 좀 회복이 되면 잊혀졌던 다이어리를 다시 끄적이곤 했기에 내 다이어리는 중간중간 항상 비어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좀 그렇긴 하다.


불안하고 예민하다는 것은 외부 요소들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현재 상태를 안전하게 지키고 유지하고 싶은 방어 기제 일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사람 많은 곳이나 모임을 꽤나 버거워한다. 막상 회식이나 모임 가서는 즐겁게 분위기도 띄우고, 대화도 주도하면서 신나게 놀기도 하기에 내가 상당히 외향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러는 것은 불편하고 어색한 공기를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임 중 대화가 한쪽으로 너무 쏠리지 않게 하거나, 대화 사이사이가 끊어지지 않게 적절한 순간에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주변을 살펴야 한다. 적당히 어릿광대 역할을 자처하는 편인 것이다. 이는 모든 곳에 신경을 알게 모르게 써야 하기 때문에 상상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어느 시점이 지나 영혼 끝까지 지치는 순간이 오면 입을 다물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집에 시간만 기다리곤 한다. 그러고는 기진맥진집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소파나 침대에 쓰러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질이 단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높은 상향 욕구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노력하며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향의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는 면이 많다고 한다. 나 또한 인생에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내 일과 내 분야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인정받는 부분들이 많다. 또한, 예민함은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 높은 감도의 안테나를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미묘한 감정 변화나 이상 상태도 즉각적으로 감지하여 신경 쓰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잘 챙겨주고, 따뜻하고, 인정이 많다고 느끼기도 한다. 깊숙한 이유는 제쳐놓더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면이 나쁘게 적용될 이유는 없다.


나는 내가 힘들어지게 된 어느 순간부터 우울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다. 나는 우울하다는 표현 대신에 '사이클이 돌았다.',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다.'와 같은 은유적인 표현을 선호했다. 내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차마 우울하다는 표현은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 나는 말이 갖는 힘을 믿었기에 어떠한 감정 표현을 직접적으로 말로 표현하거나 내뱉는 것을 굉장히 조심했다. 말로 내뱉으면 실제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행복하다는 표현조차 쉽게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표현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행복하다는 표현 대신에 '좋다'라는 표현을 더 쉽고 편하게 썼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우울하다는 표현을 상담 동안에도 쉽사리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사람이다.'


이제는 많은 것들이 명확해졌다. 주관적 견해가 담긴 나의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상담한 결과도 공신력 있는 객관적 검사의 결과도 내가 우울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근원에는 짙은 불안이 내려앉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타고난 불안함과 예민함이 여러 현실 상황을 만나 복잡하게 얽히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나의 불안과 예민함은 끊임없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고, 그 결과 강박과 우울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현재 우울한 상태이다. 누구와 비교하면 작을 수도 있고 어느 누구와 비교하면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우울함을 느끼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좁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터널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짙은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더듬더듬 앞을 짚어가며 한 발씩 디뎌보지만 적막한 터널 속 울리는 것은 휘청이는 내 발소리뿐이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상담과 자기 탐구의 과정 속에서 저 터널 너머 실낱같이 가는 빛줄기가 보이는 것 같다. 그다지 굵지도 크기도 않은 빛줄기였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빛나보였다. 여전히 어둡다. 여전히 혼란스럽다. 여전히 두렵고 힘들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래왔듯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느리지만 움직이자. 좁은 보폭이지만 내딛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괜찮다. 충분히 아파하고 나서 다시 일어나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자.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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