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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란한뼘 Jun 24. 2024

불안을 조련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불안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조련(操練)하다는 단어는 군사 용어로는 '군인으로서 전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동작이나 작업 따위를 훈련함.'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 다른 의미로는 '훈련을 거듭하여 쌓음.'이란 의미가 있다. 굳이 내가 불안을 조련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나에게 불안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제거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일 듯하다. 나에게서 떼어낼 수도 없고 떼어내도 안 되는 것이었다. 불안 자체는 이지를 갖는 개념이 아니기에 말이나 사람처럼 조련을 한다고 불안 자체가 훈련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조련하는 것은 나 스스로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지, 어떻게 통제하고 다루는 것인가를 훈련하는 것. 불안은 곧 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불안을 조련한다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나에게 불안은 추운 겨울날의 꺼지지 않는 불쏘시개와도 같은 것이다. 나의 불안은 나를 여기까지 이끈 원동력이기도 하고, 나의 성취의 동력이기도 하였다. 나의 불안은 보다 사회성 넘치는 인간관계를 만들어주었고, 주변을 향한 내 페르소나의 원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추위에 움츠러드는 몸에 온기를 더하고자 더 집어넣은 땔감이나 순간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은 불길이 오히려 활활 태워 올려 주변으로 들불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퍼지는 불길은 나라는 산 전체를 태울만큼 끔찍하리만큼 강렬하곤 하였다. 나는 그러한 상태를 우울함에 들었다고 보았다. 어느 땔감을 넣었는지에 따라 불길의 강도는 달라질 수 있다. 물에 젖은 나무와 마른 들풀에 불이 붙는 반응이 극명하듯 다르듯 나의 우울도 그러하였다. 적당히 타오르고 다시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때도 있고 너무 거세게 타올라 내 몸에 불이 옮겨 붙어 함께 불타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굉장한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쉽사리 꺼지지 않는 불꽃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며 불이 수그러질 때까지 버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에게는 불안을 조련하고 훈련하여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는 단순히 기호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불안을 조련하는 방법 중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불안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나의 불안 수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남에게는 그렇게 예민하고 민감하지만, 나에게는 어찌 그리 둔감한 지 대게 모닥불이 큰 화재가 되기 직전까지 알아차리 지를 못한다. 그 모닥불은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기도 했기에 불이 번지기 직전까지는 오히려 열정 넘치는 하루를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한동안은 내가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같고 헛된 시간 없이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뿌듯해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자그마했던 불씨가 곧 나를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이미 내 몸에 불이 옮겨 붙고 있었는데 말이다. 꼬리에 불이 붙은 말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양새처럼 나도 몸에 옮겨 붙은 불이 나를 홀랑 태워버릴 줄도 모르고 생활했는데, 그것을 요즘 내 컨디션이 좋다고만 착각하였다. 그렇기에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현재 모닥불의 크기가 얼마인지, 곧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나에게는 불안에 좀 더 민감해져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기질적으로 불안함을 달고 살아왔다 보니 민감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둔감해진 감이 있었다. 천천히 끓어오르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커져가는 불안에 점점 역치만 높아져서 온몸이 익어버리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나의 많은 감정변화와 심리변화의 이해를 불안으로부터 시작하려 연습하였다.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의 변화에 있어서는 불안에 근거하여 이해하는 방식이 꽤나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령 일을 하다가 내가 말이 많아지거나 조급해지기 시작하면 그것은 대개 불안해서이다. 일이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고 일정이 촉박해져서 일수도 있다. 가만히 생활을 하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면 그 또한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와서일 수 있다. 기존의 계획이 틀어지거나 일정이 갑자기 변하게 되는 경우 내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 상황이 왜 불안하냐고 묻는다면, 갑작스런 변화는 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는 감정적인 불편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의 작은 변화에 대한 이유조차도 놓치지 않고 불안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 그렇게 불안의 크기를 식별하고 인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지금도 여전히 훈련하고 있는 불안을 조련하는 시작점이었다.  


불안을 인지하고 민감함을 갖는다는 것은 불안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여기서 불안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불안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불안한 사람이란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잠재되어 날뛰고 있는 이 불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을 인정하는 것에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심리상담과 심리검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생애 많은 시간 동안 이과적, 공학적 사고를 훈련하며 살아온 나에게 세상은 의심하고 질문을 던져야 할 것 투성이었고, 나의 상태에 대해서도 항상 논리적으로 평가하고 접근하고자 하였다. 명확한 근거와 과정을 통한 결과를 이해하길 바랬다. 확실한 인과는 세상을 이해하는 손쉬운 방법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훈련되고 검증된 상담사와의 시간과 검사 결과는 나를 보다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내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에게 불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차츰 마음속 너머에 불안이라는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다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를 불안을 직시한다고 표현하고자 한다. 불안을 직시한다는 것은 불안과 내 사이에 있는 많은 장막을 걷어놓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과 나 사이를 가리고 있는 수많은 장막들을 내가 불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오해를 일으키고 곡해를 하게 만들곤 한다. 드리운 장막들의 색과 재질에 따라 불꽃은 때론 노랗게, 때론 빨갛게, 때론 파랗게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장막 뒤에 일렁이는 불안의 불꽃이 실제보다 작아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크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불안을 직시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내 안의 불꽃의 상태를 명확히 바라보고 그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것. 이를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앞에 드리워진 장막을 치운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메타인지와도 같다. 메타인지는 어떤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문제에 대하여 인식하고 문제해결의 목적 또는 목표에 따라 해결과정에서 자신을 모니터링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입으로 소리 내어 "OOO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OOO는 불안한 상태이다."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방식을 택하였는데, 이는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인식을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나면 보다 침착하게 나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끓는 물속에 있는 것이 아닌 끓는 물을 지켜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 끓는 물 속에는 라면을 삶을 수도 파스타면을 삶을 수도 있었다.


3인칭으로 소리 내어 나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은 제 3자가 나의 상태를 말해주고 그 말을 나의 귀로 듣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그러고 나면 사정없이 뒤흔들리고 있던 마음이 다잡아지고 나를 다시 한번 천천히 관조하게 되었다. 내 불안이라는 말의 고삐를 움켜쥐기보다는 놓아주고 관찰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불안은 내가 쉽게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항상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나 스스로보다는 남에게 좀 더 민감한 나에게 있어서 이는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실 심리학적으로 정신병리학적으로 이것이 옳은 방법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상담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논의하고 다듬는 과정을 지나긴 했지만, 누구에게나 이 방식이 효과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굳이 내가 겪은, 겪고 있는 이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까닭은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일말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기 때문이다.

 

불을 조절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어릴 적 조부모님 시골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놀 때를 떠올려보면, 불은 참 신비롭고 두려운 존재였다.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왜 불'꽃'이라고 표현하였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고 있다가 할머니께 불장난한다고 매번 한 소리를 듣곤 했지만 말이다. 여전히 나에게 불안은 불과 같다. 걸핏하면 불꽃이 나를 집어 삼킬 만큼 커지기도 하다가 스스로 작은 불씨만 남기고 사그라들기도 한다. 때문에 나는 이 제멋대로인 불꽃을 통제한다기보다는 한 발자국 떨어져 관조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불안을 인지하고, 불안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인정하며 불안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지금껏 내가 불안을 조련하고 있는 방법이다.


여전히 불안을 다루는 것은 어렵고 서툴다. 조련하고 훈련한다는 표현을 했지만, 어떠한 체계적인 방식과 과정을 겪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의 방식을 하나씩 검토하고 시도해 보는 중이기에 여전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상담선생님께서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저 멀리 마법의 성과 같이 보이는 희미한 목표뿐이다. 결국 직접 해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잡아야 했다. 작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것은 나의 생존의 문제였다. 더 이상 전처럼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기를, 혹여 무너지더라도 좀 더 굳세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요동치는 불안의 불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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