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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란한뼘 Jun 28. 2024

스위치가 또다시 내려갔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에요.

전체적인 글을 지나온 시간 순서대로 정리를 하고 적어 내려가려 했으나, 그 사이 다시금 찾아오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어 일관성 있게 글을 써 내려가기가 쉽지만은 않다. 여전히 나는 하루하루를 거칠게 다투어 살아내야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간 글에서 마치 대단한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듯 표현한 것들이 민망하게 느껴지고 무색해질 정도로 여전히 나는 취약하고 나약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 멋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사실 브런치에 글을 쓰고자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자기 치유와 자기 탐구의 일환이었다. 내가 경험하고 지나온 시간들을 하나 둘 정리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는 마치 지나온 발자국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것과 같다.


이때는 발자국이 비뚤어졌는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때는 발자국이 어긋나 있는데 왜 그랬을까.
이때는 발자국이 옅은데 무슨 마음이었을까.

이 발걸음에는 슬픔이 묻어 있구나.
저 발걸음에는 아픔이 묻어 있구나.
허물어지는 마음을 기어코 붙잡고 여기까지 왔구나.
비틀거려도 반듯이 걸어왔다고만 생각했는데, 되돌아보니 애처로이 휘청이는 그 흔적에 잘 버텨와 줬구나.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을 금하기가 어려워 가능한 무던히 글을 써보려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최근에 또 스위치가 내려갔다. 이번에는 조금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그럴 흐름도 아니었다고 생각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요새 괜찮다고 생각하다 갑작스레 스위치가 내려가버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건 둘째치고 밀려드는 실망감에 기운이 쑥 빠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스위치가 내려갔다는 표현보다 적합한 것이 있을까 싶다. 서서히 나빠지거나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꺼비집을 내려버린 듯 혹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주저앉아 버리곤 한다. 스위치가 내려갈 때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는데 그건 바로 잠에서 도통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피곤할 이유가 없는데 내 온몸이 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전력으로 거부하는 듯이 잠에 파묻힌다. 자다 깨서 배고프면 간단히 허기만 채우고 다시 잔다.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것일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일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렇게 스위치가 꺼져버릴 때는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도 갑자기 스위치가 탁하고 켜지듯 상태가 좋아지곤 한다. 오히려 서서히 늪에 가라앉듯 상태가 나빠질 때는 회복하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늪 속에서 다시 기어 나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와 살기 위한 굳센 각오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에 내려간 스위치도 다행히 2~3일 정도만에 평범한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저절로 스위치가 다시 올라갔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스위치를 겨우 다시 올리고 나서 곰곰이 복기를 해보면 생각나는 몇 가지 원인들은 항상 있다. 최근에 쉴 틈이 크게 없기도 한 와중에 일적으로도 긴장을 꽤 하고 있는 상태였고, 직전에 사회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저녁 식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저녁 식사 겸 회식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맛있는 음식에 곁드는 반주를 꽤나 좋아하지만,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한다. 주량이 작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숙취가 너무 심한 편이기도 하고 다음 날 나를 굉장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편이라서 평소에 과음을 굉장히 조심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철저히 훈련된 사회성은 술자리에서 거절이란 것을 모르고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더 오버하곤 하다 보니 한두 잔 주고받는 술잔이 어느새 한 두병이 돼버리곤 한다. 이번에도 다를 게 없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번에 스위치가 내려간 이유는 여러 상황이 누적되어 가는 순간 알코올로 인해 발생해 버린 누전 때문이라 봐야겠다.


또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일 년에 아니 분기에 한 번은 꼭 스위치가 내려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아직 내가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에 미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려갔던 스위치가 올라가고 나면 다시 의기양양하게 마치 새롭게 태어난 마냥 다시 열심히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발버둥 치던 중에 지나가던 바람 한 점이라도 옆에서 툭하고 건들고 나면 다시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다시 쓰러진 바닥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난다. 수십 번을 그러고나면 중간을 찾을 법도 하지만, 내가 멍청한 것인지 우둔한 것인지, 아니면 우직한 것인지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최선의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나에게 0과 1 사이 그 애매한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만 느껴진다. 감도 잘 잡히지 않는다. 0에 가까워져 가면 뭐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아 안절부절못하고, 1에 가까워져 가면 나라는 모래성에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불안해진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워 발버둥을 치는 것일까?


나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좋아지고 싶다. 책도 많이 읽고 싶고, 공부도 꾸준히 하고 싶고, 악기도 잘 다루고 싶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멈춘 것 같아 불안하다. 마치 고여있는 물이 썩어가듯이 나도 그러해질 것 같아 불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하루를 보내는 것은 의미 없는 삶이다. 의미 없는 삶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과연 어떡해야 하는가. 나의 20대 내내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나를 괴롭혔던 질문이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서 오랜 시간 괴로워했다. 그러던 와중에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찮게 읽게 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조금은 위안을 얻은 있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 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에요.

-

사람이 사는 것도 그냥 다 사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삶이 즐거운지 아니면 괴로운지는 자기 마음을 제대로 쓰느냐 못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

그러니 '왜 사느냐'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올바른 질문입니다."


법륜스님의 통찰력있는 답변에 내 삶이 바뀌지는 않았을망정 맹목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다. 나는 내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허상을 꽤나 오랫동안 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위치가 내려갔던 며칠간 꽤나 고통스러웠다. 이제 다시 올라간 스위치로 인해 전구에 불이 반짝인다. 여전히 불안함과 우울감을 물에 젖은 솜마냥 짊어지고 살아가는 오늘. 다시 하루를 살아갈 용기와 기운을 낸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은 하루이길 바란다. 하지만 모든 것을 쏟아내는 하루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괜찮았으면 한다. 그저 하루라도 더 길게 괜찮기를.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데 급급하지 않기를. 조급해말고 불안해 말기를. 너무 최선을 대하 살지 말기를.


그렇게 오늘도 0과 1 사이에 다시금 줄 위로 올라 기우뚱 불안한 외줄 타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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