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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란한뼘 Jul 15. 2024

일기 대신 감정 보고서를 써보자.

뭐라도 시작해봐야 하지 않을까.

몇 번의 심리상담을 지났다고 내 삶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던가, 드라마틱한 순간이 다가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조금 헷갈리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간 읽어왔던 여러 심리상담 관련 책이나 소설들에서 굉장한 변화의 순간들을 봤었기에 심리상담 전에는 나에게도 그런 것이 찾아올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첫 상담을 하고 나서 느꼈던 것은 이 또한 그냥 사람 사는 과정이구나 싶었다.


상담선생님의 말에 반항심이 들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부정하기도 하고, 갸웃거리기도 할 수 있다. 그 말이 항상 맞거나 옳은 방향을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열린 마음을 유지하려 했지만,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싫은 부분도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또 어느 부분에서는 '어라? 헛짚으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상담을 한다는 것은 거대한 돌덩어리를 조심히 깨어나가는 그 안에 숨겨진 보석을 찾는 것과 같다. 보석이 얼마나 어디에 숨어있을지 알 수 없기에 최대한 겉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끌과 정을 이용하여 돌을 깨어나가야 한다. 성급하게 손을 놀렸다가는 숨어있던 보석도 함께 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담 선생님과 대화는 이 돌덩이의 어느 부분을 얼마나 어떻게 깨 볼까 하는 과정이다. 한 번의 대화를 통해 많은 부분을 깨어낼 수도 있으나 실수로 마음의 보석을 부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내담자의 태도에 따라 한 번의 손짓에 티끌만 한 부분만 털어버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한 마디에 인생이 변화하거나 거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 내가 살아온 시간이 시간을 지나며 내려온 뿌리는 그렇게 얕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형성되는 삶의 태도, 생각, 성향은 쉽사리 바뀌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담금질하는 쇠와 같은 것이다. 시간은 마음의 쇠를 쉬지 않고 두들기며 모양을 잡아간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성격이나 성향, 고집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고집이 사람은 아니지만, 그동안 홀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방어적인 태도로 대한 것도 많았다. 떤 면에서는 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공과같이 사방으로 찔러대며 대화 내내 굴러다니기도 하였다.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하는 것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하는 것들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일들 중 하나이다.


현재는 상담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시 상담을 다시 시작할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내가 다시 상담을 시작한다면 이는 분명 좋은 이유로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서 굳이 심리상담을 찾아가지는 않지 않은가? 그래서 때론 힘든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을 때가 생각나기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변에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또 있더라도 힘든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게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남의 힘든 이야기를 듣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의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는 나를 심정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기분이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듣고 흘려보내고 싶지만, 도망칠 곳 하나 없는 곳에서 몰아치는 부정적인 감정에 허우적 되곤 한다. 심정적으로 강하게 공감하고 반응하기에 말하는 사람은 잘 들어주는구나 싶겠지만, 나에게는 온 에너지가 빨려나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상담 이전에는 힘들 때마다 일기를 쓰고는 했다.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고, 기록을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감정을 다독이고 좀 더 나아지길 바랐다. 힘든 이야기, 슬픈 이야기, 괴로운 이야기가 가득했기에 사실상 일기라기보다는 감정 쓰레기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쓰레기통이 얇은 공책으로 여러 권 있었으나, 상담 이후 대청소를 하다가 다시 발견하고는 모두 정리해 버렸다. 읽어보니 대게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었고 비슷한 부분에 지속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일은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매가리 없는 문장들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웃긴 것은 과거의 내 괴로움의 기록을 들쳐보던 그 순간까지도 그 당시 감정에 다시 먹혀들어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와 비교해서 딱히 나아진 사람이 되지 못한 것도 슬펐고, 매 글 끝에서 반복되는 자그마한 소망이 딱히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힘이 빠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감하게 다 버렸다. 누구를 보여줄 만한 그런 기록도 아니다. 부끄럽기보다는 우울해서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 정리해버리자 싶었다.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의미 없고 나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저 내가 활용을 잘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정 일기를 쓰려면 쓰레기통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수거장으로 사용했어야 했다. 당시 휘몰아치는 힘든 감정에 두서없이 오물을 쏟아내기보다는 하나씩 차근차근 꺼내어 확인하고 정리하고 분리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속에 삿된 것들을 제대 처리하지 못하고 가득 차올라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 오면 이성적인 사고는 이미 상당 부분 정지되어 있는 상태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은 나에게 더 익숙한 형태로 접근하고자 한다. 바로 감정 일기가 아닌 감정 보고서이다. 보고 양식 문서야 말로 직장인인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형태가 아닐까. 뒤섞인 감정을 그저 정신없이 꺼내놓는 것이 아닌 한 조각씩 떼어내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아직 제대로 된 양식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간단히 생각해 본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날짜 / 기온 / 날씨 : (환경적 상황 기록)

2-1. 현재 생활 상태 :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 집안이 더럽다. 빨래가 쌓여있다 등)

2-2. 현재 신체 상태 : (피로가 쌓였다. 오른쪽 발목이 뻐근하다. 소화가 잘 안 된다. 숙취가 심하다 등)

2-3. 현재 감정 상태 : (무기력함에 의욕이 떨어진다. XX한 이유로 슬프고 우울하다 등)

2-4. 현재 감정 지수 : (우울 1-10, 불안 1-10, 슬픔 1-10, 짜증 1-10 등)

3. 불안을 느끼는 요소 : (곧 다가오는 프로젝트 진행이 더디다. 준비가 미흡하다. 갈등상황에 있다 등)

4. 불안 해소 방안 및 계획 : (프로젝트 준비에 도움을 청한다. 일을 나눈다. 필요한 내용에 대해 상세 계획을 수립한다 등)


우선은 이러한 방식으로 보고서 양식을 만들어 실천을 해보려 한다. 해보면서 구성도 바꿔보고 양식도 수정해 보고 여러 가지 변화를 줘볼 생각이다.  우울은 불안에 기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불안에도 초점을 잡아볼까 한다. 뭐랄까 최대한 담백하게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을 기술하더라도 너무 은유적인 표현들은 자제하려고 한다. 두서없이 감정을 토해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순간 그 감정에 취해서 더 과한 표현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다 직관적인 표현들과 정량적인 수치로 묘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게 한다면 추후에 돌아보고 취합하고 정리를 하는데도 훨씬 수월할 것 같다.


일단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저것 재보고 따지는 나에게는 시작이란 것이 참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 큰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른다. 그냥 해보는 거다. 이래나 저래나 내 상태는 반복적으로 나빠지고 있다.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브런치에 글을 보다 오래오래 써서, 이 감정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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