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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Jul 25. 2020

부모님이 폐교로 이사 갔다

건축학도 딸내미는 고민도 많아졌다

우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 부모님께서는 은퇴 후 아주 작은 폐교(학교 건물 실내만 약 60평, 대략 교실 두 개 크기)를 구입하셨고 그걸 리모델링해서 살기로 마음먹으셨다.


이 얘기를 주위에 하면 놀라는 분들도 있고 부러워하시는 분들도 있고 어쨌든 신기해한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이런저런 도전들이 익숙하지만 쨌든 이번 건은 큰 프로젝트임에는 확실하다. 왜 내가 고민이 많냐 하면 참고로 나는 건축학과를 졸업한 건축학도지만 건축으로 먹고살지는 않는다. 졸업하자마자 LED조명 제조업체에서 해외영업 일을 3년간 했다. 건축이 싫어서라기보다 건축을 하다가는 내가 굶어 죽기 전에 건강을 잃어서(밤샘과 과로로) 진짜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이 선택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버틸 수 있는 체력이었다면 그곳에서 버티다가 지금의 선택들을 못했을 터이니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다.


얘기가 잠시 샜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부모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듣고 고민에 휩싸인다. 여수의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주택으로 고친다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렇게 나는 졸업 후에도 자주 연락을 해왔고 실력도 있으신 선배님한테 연락을 하게 되었다. 선배님은 이미 건축사무소를 차려서 독립한 상태였고 나는 이 프로젝트가 재미난 프로젝트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현장 미팅 날짜를 잡고 여수 Expo역에서 선배님과 만나기로 했다. 나는 아이 둘을 남편에게 맡겨  ktx에 몸을 실었다. 건축소장님이자 선배님이 혼자 ktx를 타고 오셨고 우린 오랜만에 재회했다. 아빠가 차를 몰고 역으로 오셨고 나와 선배님을 태우고 폐교까지 20분간 달렸다.

폐교 입구. 사자 동상들이 인상적이었다.
운동장은 기존 주인이 갓을 키우고 계셨고(여수는 갓김치가 유명하다고 했다)  지금은 다 정리되고 잔디를 깔았다
어린이(?) 동상도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실 내부


갑분 만두? 만두가 맺어준 인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간은 넓었고 커다란 나무, 그리고 학교 동상들, 모든 게 좋았다. 일단 부모님을 만나자마자 나는 만두 빚는 걸 도와드렸다. 우리 집은 항상 명절이든 손님이 오든 만두를 직접 빚어서 대접한다. 그게 익숙해서 사실 손이 많이 간다고도 생각 안 할 정도다. 할머니가 살아계시고 나도 독립하기 전에는 우리 다섯 식구 모두가 모여 엄마가 만두피를 빚으시고 나랑 할머니, 여동생이 만두를 싸고 아빠가 만두 삶기 담당이었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뿌듯해했다. 특히 아빠는 당신의 만두 삶기 스킬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며 으쓱해하시기도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만두가 가족의 소울푸드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는 그런 소박하지만 정이 가득한 음식 말이다.


만두 얘기로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내가 이렇게 만두에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 만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선배님은 일단 현장을 보러 오신 거였다. 우리는 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였고 그냥 현장을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려고 여수로 방문하신 거였다. 밥 먹기 전에 선배한테 내가 물었다.

“선배님, 점심에 외식하려면 차 타고 나가야 하는데 그냥 집에서 만두 했는데 그거 드시는 건 어떠세요?”

나는 먼길까지 오셨는데 더 좋은 걸 대접해 드리지 못한 게 조금 마음에 걸려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배님의 눈이 반짝이며 이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 3가지가 있는데 카레, 두부..... 그리고 만두야. 나 완전 만두 좋아해!”

그냥 만두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으면 만두 싫어하는 사람 없지 뭐...라고 생각했을 텐데 선배님은 생일날에 이 3단 콤보를 드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이건 찐이다 싶었다. 그렇게 우린 화기애애하게 만두와 수육을 먹으며 폐교 얘기를 했다.


이걸 이제야 남기는 이유는 앞으로의 기록들을 남겨놓는 게 중요한데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어서였다. 집을 짓는 것도 생각해야 할게 많은데 리모델링을 한다는 것, 그리고 건축주와 건축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의 임무가 막중함을 느꼈다. 부모님은 무조건 한정된 예산, 아니 되도록 금액을 아끼고 싶어 하셨고 나는 그렇게 하면 이도 저도 안되고 큰돈만 버리는 싸구려 결과물이 나올 거란 것도 알았다. 나는 선배님과 흔치 않은 이 기회를 잘해보고자 의기투합했고 선배님도 후배의 부모님 집을, 그리고 재미난 프로젝트인 폐교 리모델링에 대한 기대 역시 가지고 계셨다.


이 건은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 전원 속의 내 집이든 뭐 잘 나가는 건축잡지에 싹 다 나갈 만큼의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나도 거기서 하고 싶은 공간들 좀 대리 만족하면서 만들고 싶고.... 갈길이 멀다. 부모님이 나를 닦달한다. 통화를 하면 기본 45분인데 같은 말만 반복하신다. 내가 어떻게 든 정리를 하고 진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건축학도 딸내미의 고민이 깊어졌다고 한 것이다.


차근차근해보자. 파이팅해보자. 나 자신.


P.S. 그렇게 긴장된 상태로 어제 영상통화를 1시간 넘게 나눴는데 내 목소리는 쉬어 버렸지만 일단 오해는 일단락된 듯하다. 역시 모든 건 커뮤니케이션이다. 말을 안 하면 더 많은 오해가 쌓이고 자신 안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놔야 한다. 진심은 통하고 그리고 글로 남기는 건 더더욱 중요하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다음 이야기는 부모님이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건축소장님(선배님)과 시공사 대표님과 미팅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진짜 갈길이 멀다. 하지만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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