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려!"를 외치다가도 "왜 앞만 보고 달려?"라고 나에게 질문한다. 지난주 한강에서 5km 30분 달리기를 했는데, 본 것들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숨 쉬기 속도, 시선, 팔 동작 등 내 모습만 기억한다. 이튿날 다시 뛰었을 땐 3km를 같은 시간 안에 뛰며 강 위에 떠다니는 보트와 야간 낚시 하시는 분들을 관찰했다. 그 시간 속 나는 편안했다.
같은 방식으로 먹는 거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왜 만들어진 걸 먹어야 해?" 오늘 아침 8시에 삶은 검은콩을 믹서기에 갈아 콩물로 만들었다. 물을 많이 넣으면 두유가 될 줄 알았는데 두부 갈아먹는 맛이 나고 면을 넣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이 행위를 하면서 이제껏 먹은 가공식품에 대한 반감이 들었다. 건강하게 해 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내 미각이 증명한다. 마트에서 구매한 검은콩 우유에서는 설탕을 넣은 우유 맛, 아몬드 우유에서는 아몬드 1초 우유 같은 단 맛이었다. 꾀에 당하고 있었는데 빨리 식욕을 해결할 수 있다는 속도감에 미쳐, 의문을 제기할 의지가 없었다.
하산할 때도 비슷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등산을 할 때도 풍경을 보지 않고 빨리 올라가려고 하는 게 보인다. 최근 한 달 산을 세 군데 다녔는데, 콩콩 돌산을 뛰어내려 갔던 사람들은 천천히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무릎 보호대를 사려고 했다. 목적이 오로지 속도에 맞춰진 거다.
반대로 해봐야 한다. 느리게 가면서 하늘을 한 번 쳐다보면, 우리가 자연의 소리를 얼마나 잊고 살았는지 느낄 수 있다. 단풍은 항상 붉은 것이 아니라 연둣빛에서 서서히 바뀐다는 걸, 돌산 위의 계단은 누군가 만들어줬기에 지금 편하게 갈 수 있는 거라는 걸 몸으로 느껴야 세상에 감탄할 일이 늘어난다.
음식에서도 그렇다. 요리를 하면서 내가 만든 음식이 내가 먹었던 것과 맛이 다르게 느껴질 때, 이제껏 얼마나 많은 걸 입속에 부어 넣고 있었는지 보인다. 나를 유혹했던 맛을 뿌리치면 원재료의 맛을 이끌어내고 싶어진다. 결국 우리는 '본질은 무엇인가'로 돌아간다.
진리는 한 면만 본다고 알 수 없다. 정말 다 아는 거 같을 때는 거꾸로 가보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