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핏을 한 뒤로 손을 쓰는 일이 늘었다. 땅바닥을 집거나 철봉을 잡을 때는 물론이고, 운동이 끝난 뒤 서로에게 "고생하셨습니다."라며 하이파이프를 하거나 엄지 척을 날릴 때도 쓴다. 음악이 커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코치님에게 말보다 동작으로 자세를 배우고, 아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양팔을 ㄴ자로 만들어서 앞뒤로 흔들며 뛰자고 한다.
손에 굳은살이 박히는 사람들은 손바닥을 위로하고 양손을 펼쳐서 보여준다. "여기 굳은살 봐. 장갑을 껴도 생겨."라면서 영광의 딱지를 내세운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이 손바닥과 연결된 뼈 부분, 기타를 치는 사람은 손가락 끝, 손글씨를 쓰는 사람은 손가락 옆이다.
내가 손이 예쁜 사람을 유독 잘 기억한다는 걸 깨달은 뒤, 건조한 부분을 없애려고 손 관리를 시작했다. 다이소에서 3천 원어치 큐티클 리무버를 사서 2주에 한 번씩 정리한다. 손을 씻은 후에는 핸드크림을 바른다.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내 손이 나에게 잘 보였으면 해서 반지를 껴보려 했다. 10년 넘게 시도해 봤지만 적응할 수 없었다. 의무감에 커플링을 3-5년 정도 껴봤지만 그때도 반지를 뺐다 꼈다를 하루에 수십 번씩 했다. 그때의 남자친구에게 이 말을 했더니, 본인도 그러다가 화장실 세면대에 들어갈 뻔한 거 잡으면서 오랜만에 비속어를 썼다고 말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반지를 끼면 손가락 사이에 거슬리는 걸 참을 수 없다. 어렸을 때랑 관련이 있는 건지, 베일 거 같다. 5살 때 집에서 돌아다니는데 아빠가 칼날을 들고 내 옆을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 본 엄마가 "애 칼 베이면 어쩌려고 그래! 손을 들고 가야지!"라고 하셔서, 아빠가 한쪽 팔을 위로 드셨다.
초등학생 때는 사마귀 치료를 받으러 아빠랑 아침마다 병원에 갔다. 오른쪽 검지 손톱 바로 아래에 사마귀가 내 손톱보다 크게 올라왔다. 스트레스가 올라올 때마다 손톱도, 벌집처럼 올라오는 상처도 피가 날 때까지 뜯었다. 아플수록 염증은 반응하면서 더 커졌고, 왼손에도, 발에도 퍼졌다. 냉동 스프레이에서 나온 연기가 몸에 닿을 때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견딜만하네.'라고 했다가 3분 뒤에 눈물을 흘렸다.
스트레스가 올라오면 씹으려고 한다. 그래서 유치원생 때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손톱/발톱을 다 뜯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 내 손을 봤는데 더럽게 못 생겨서 '아, 그만해야지.' 한 번 생각한 뒤로 영원히 멈췄다. 이때 자제력이 대단했는지, 입학하기 전에 10kg을 감량했다. 이성에 눈을 뜬 게 큰 영향을 발휘했다.
지금까지 있는 손을 당연하지 않게 더 아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