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글드글 책 수레 속 슬기로운 책방 생활
지혜로운 생활은 언제든 책 표지를 구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언제고 그 야무진 사각형 액자 안을 엿보는 일, 그 오만가지 액자 안 깊숙이 숨어있는 오아시스에서는 매일같이 조금씩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 그렇게 서가에서 서가로 이동하면서 그간 못 봤던 책들을 구경하다 보면, 그 애가 생각난다. 언젠가 급식 시간표를 책상에 소중히 붙여놓던 시절에 짬만 나면 무릎 위에 책을 올려두고 밥을 먹으면서도 수다까지 열심히 떨던 그 애만의 특이한 포스가. 지금 생각해봐도 대체 어떻게 눈에 띄지도 않게, 축지법을 쓰듯이 후루룩 종이를 넘길 수 있었는지. 아직도 책이 있는 곳에만 들어서면 그 애 모습이 생각난다.
어떤
마술처럼.
물론, 모두가 그 이름은 알지만, 정작 읽지는 않았다는 전설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속 격언처럼, 그 모든 기억은 위험한 약국이다. 그 약국에는 언제나 진정제와 독약을 한 손에 동시에 쥐여준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할 뿐, 한없이 사랑스럽고 푸근한 기억 속에도 어떤 심연을 깔아둔다. 그러니 잘 기억하는 사람은 그간 적립해 둔 추억에서 위안을 얻으면서도, 때때로 스스로에게 해를 입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그럼 어찌할까? 축복과 저주를 한데 뭉쳐서 던져진 이 꿍한 덩어리들을?
하지만 애석하게도 별도리가 없다. 기억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만약, 진정제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독약이 두려워 그 병의 뚜껑조차 열지 않는다면,
“다른 숱한 날들처럼 심연을 알 수 없는 나락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온몸은 점차 투명해지고, 뜨거운 짝사랑의 열정으로 어떤 악마의 손길이 붙잡혀 눈이 멀고, 온몸은 불덩이가 된 채 불같이 일어나는 폭풍 같은 삶을, 그런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든 예술 중에 가장 으뜸인 기억의 예술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 <견뎌내기>
그렇다. 그만 뒤의 일이 두려워 우물쭈물 하다가는 그만 모든 걸 잃는다. 애초에 모 아니면 도인 이상한 게임. 그 처음부터 어딘가에 불쑥 던져진 것만 같다. 그러니 계속 읽을 수밖에. 우물은 목마른 자가 파야지, 지하수가 나올 때까지 우물을 파내면서 새로운 책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렇게 계속해서 스스로 발품을 팔아 금광을 캔다. 그러다 언젠가 특이한 동굴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냥 보면 작고 아담한 동네 서점일 뿐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아수라장이 느껴지는 특이한 곳. 이 고즈넉한 곳의 외벽과 서가 곳곳에는 노랑색 포스트잇이 알차게 매달려 알쏭하고도 아수라장인 문장들이 언덕 위의 깃발처럼 나부낀다. 꼭 사람이 손짓하듯이 손님이 오고 갈 때마다 팔랑 인다. 그 외에도 뭐였더라, 무엇보다 계산대 앞에는 앙증맞은 책 수레도 있다. 끙끙대면서도 수레 한가득 양서들을 싣고서 어디든 돌아다니고 싶은 그런 탐나는 수레가. 어쩌다 장난기가 돋아서 일부로 위태롭게 묻혀있는 책을 골랐다. 그 작은 책은 우물 안 깊숙이에 묻혀서 중앙에 일부 책등만이 겨우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젠가 게임 하듯이 주위에 다른 벽돌들이란 흔들림 없이 두면서, 오직 그 책등만을 쏙 뽑아든다. 이에 언제부터 지켜 본 것인지 몇몇 손님들이 사장님과 함께 손뼉을 친다. 이제는 아예 본래 찾던 책은 뭐였는지 잊고서 이렇게 한눈을 팔고 있다. 그리고 이참에 딴 길로 빠진 김에 첫 장을 읽어 본다.
그러니까 이 책의 첫 문장은.
그러니까 뭐냐면, 뜬금없는 인용으로 시작한다.
“늘어진 쪽 머리를 힘없이 빗질하고,
수심에 잠겨 눈썹을 억지로 그리는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진 나의 심사.”
-유영 <금당청>
심사라. 이내 시들해진 심사. 그래, 그 모든 것들이 어느새 만사가 의미 없어질 때가 있다. 모든 심사가 시들해진다. 그것이 특별히 아끼던 일일지라도 실로 권태롭고 항시 온몸이 비비 꼬이고 눈은 침침해지고 만다. 이런 독자의 마음을 이 종이도 아는 것인가? 필시 독자로서의 생 대부분은 장마철 물기에 젖은 시래기처럼 속절없이 축축 늘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보통의 날인걸. 그러니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한눈팔 지점을 파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깊은 땅굴 입구에 온갖 빌린 책, 산책, 버린 책들을 깃발 삼아 굴의 입구를 표시해둔다. 꼭 바지런한 다람쥐처럼. 매일같이 새로운 도토리를 묻어두고, 정작 저장한 장소를 까먹는 털북숭이처럼. 매일같이 아예 새로 시작하고야 마는 이 다부진 영물을 본받아 부지런히 책방을 둘러봐야겠다. 익숙하지만 또 귀하게 여기면서. 오늘도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