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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 Apr 11. 2021

작자미상 10 -서리

-언젠가 쁘띠쉘 스티커를

언제였나? 그래, 쉬는 시간 종소리가 배차 간격처럼 일정하고도 둔탁하게 울리던 시절, 간이 책상에 붙어버린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던 때였다. 온몸이 흐물흐물, 몽롱한 상태로 이대로 망부석이 되지 않기 위해 복도 사이를 걷던 때, 모든 일은 학기 내내 천천히 흘러갔다. 때로는 그 속도가 너무 느리고 둔탁해서, 그 고요함에 실증이나 스스로 화가 날 만큼. 그저 계속되는 이 평안 속에서도 자주 배앓이를 하는 내가 싫었다. 그나마 쉬는 시간 종소리가 울리고 울타리 밖으로 방목되는 양 떼들처럼 우르르 교실 밖을 나설 때에야 조금 숨통이 트일 뿐.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정도의 갑갑함이 앞으로 영원히 가장 낮은 강도의 답답함이란 걸. 그 당시엔 그저 그 특색 없는 날들을 미워했다. 그저 고요하고 천천히 졸졸 흐르는 산골짜기 깊은 샘물처럼 오는 시간이, 그 당연함에 진저리치면서……. 

 그런데 이제는 대려 물살이 너무 빨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투정부린다. 제발, 잠시 천천히 가달라고 수원지에다 빌고 싶지만, 애초에 그 물이 어디서 오고 가는지 알 수도 없다.  이제는 그저 이미 지나가 버린 그 리듬을 되짚어 볼 뿐, 옛말대로 모든 지나간 것들은 뭔가 그리워지는 애틋함이 있다. 별 특징도 모험도 없던 일상이 가진 빛을 이제는 느낀다. 무엇보다, 그때는 적어도 시간의 리듬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창밖의 사계가 수업시간 사이사이 간이역처럼 쉼표를 찍고, 친구들과 책상을 맞대고 앉아 급식을 먹으면서 나누는 잡담 속에서도 은은하게 틈틈이 퍼지는 리듬감. 이제는 흘러가는 한 주마저도 어떻게 지났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사실 이런 변화는 당연한 일임에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 힘들다. 마치 갱년기에 많은 이들의 잇몸이 그간 세월에 그만 풍치를 얻고, 충치 없이도 이를 뽑아야 함을 알고 황망해하듯이. 순간 주치의에게 억한 심정이 치밀어 오르는 때처럼, 아니 섞은 이도 아닌 멀쩡한 이를 왜 뽑느냐고 병원의 상술이냐는 항변에 가차 없는 전문가의 고견.


 “다른 병원에 가셔도 진단은 같으세요. 

지금 안 뽑으시면, 환자분 잇몸의 염증이 혈관까지 그대로 퍼집니다. 그게 패혈증이에요.”


  그리하여 결국, 마취 직전에서야 그만 체면을 잊고 엉엉 울어버리는 어떤 중년처럼. 이런 야속한 풍경이 조금 일찍 내 앞에 펼쳐지는 기분, 어떤 중대한 진단을 받아든 느낌이다. 이젠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다. 이제는 완벽히 다른 단계로 넘어온 것이다. 앞으로 얼마간은 몇 정거장은 그냥 우습게 지나치는 급행열차를 타고, 눈앞에 잠시 들르고 싶은 아기자기한 간이역에 잠시 들러볼 여력도 없다. 핑계를 대자면 방학도 급식도, 같은 반 학우도 없는 투명한 세계에서 주어진 자유는 버겁고, 무겁다. 꼭 물 먹인 솜처럼 먹먹하니 축축하니 묵직하니, 자기만의 방 하나 갖는 일조차 거창한 사업이 되어버리니까. 인정하고야 만다. 확실히 이제는 자신만이 가진 힘이 없이는 시작도 할 수 없는 판 안에 우리 모두 서 있다. 그 당사자가 설령 게임을 시작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대도, 봐주는 법도 없이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원칙만은 가차 없다.계속해서 다음, 이다음 세대로. 단지 아주 정직하고도 잔인하게 한 해가 카운트 된다. 이런 매우 급박한 상황에 준비 없이 선 이는, 이제는 차례로 넘어가 지지 않는 책장 앞에 황망하게 서 있다. 그러다 제풀에 그만 지쳐서 세상만사가 싫던 때, 그런 헛헛함을 안고 연신 감정이 추스르지 못해 혼자 빈 깡통 치는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 앞길 편의점에서 빵 봉지를 뜯고 있는 학생을 봤다. 하복 입는 게 엊그제던데 벌써 춘추복이구나. 보슬보슬한 갈색 가디건이 휘날리고, 그 애는 골똘히 서 있다. 그 앞에서 대체 뭐에 그리 집중 하나 했더니, 보기만 해도 초조한 손끝으로 빵 봉지를 뜯으면서.

 아. 유행은 돌고 돈다고, 태초에 빵에는 스티커가 있었지. 혹시 저 애도 교실 걸상에 스티커를 모아둘까? 정작 그 학생은 득템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뜰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심란한 마음을 비집고, 사사로운 기억이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에. 사소하지만 또 사소하지 않던 일이.


                                     


  평소와 다름없던 어떤 날, 일 교시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울타리 갇혀 있던 양들이 왁자지껄 복도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 복도 끝 화장실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희한한 걸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 반 바로 옆 반 미닫이문의 열린 틈 사이, 맨 끝 열에 있는 책상 하나가. 거푸집을 찍어 놓은 같은 책상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띄었다.

 책상 모서리에까지 빽빽하게 판박이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는데, 어째 저걸 하나하나 다 붙여 모아두다니, 조금 자세히 보니 한창 유행 중인 웹툰 캐릭터였다. 아마 책상 주인은 풍선껌을 씹으면서 기포가 생기지 않게  손바닥으로 판박이를 눌러 붙였겠지. 왠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가서 혼자 웃고 말았다. 이 닭장 안에서도 자기 식대로 재밌게 지내는 애도 있구나, 환기하면서. 그리고 그 책상에 대한 기억은 곧 잊혀졌다. 

 어느새 시간은 굽이굽이 흐르고 흘러 다음 학기로 넘어왔다. 나는 여전히 빽빽한 그 책상에 앉게 됐다. 새 학기 영어 분반 수업을 그 옆 반에서 했는데, 하필 배정받은 자리가 그 자리였다. 그제야 빼곡하게 붙인 스티커가 말고 이름표를 보니, 딱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갈 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어차피 엄청난 인싸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같은 학년 모두의 이름을 알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좀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같이 적어도 몇 년간은 같은 학교에서 동갑내기로 생활하는데도 앞으로 평생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실제 반년이 지나가도록 우리 반 아이들 이름도 헷갈리는 내가 있다. 실전에서 실수하지 않으려 그 애 이름만 직접 부르지 않으려 노력 중이었는데, 그런 생경함으로 책상 모서리 끝에 붙은 이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로는 교실을 바꾸는 재미가 있었다. 영어 시간마다 그 애의 책상에 돌고 도는 컬렉션들을 구경하는 재미로 등하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쯤 흘렀나, 슬슬 이동 반 자리가 익숙해질 때쯤, 그 애의 컬렉션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책상 한가득 촘촘히 열을 맞춰 붙여진 스티커는 여전했지만, 언제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 이젠 판박이 대신 쁘띠쉘이다.다른 애들이 오갈 때 판박이가 잘 긁혀서 그랬나? 이젠 붙였다 때었다가 가능한 쁘띠쉘로 종목이 바뀌어 있었다. 그에 따라 책상 밑 서랍에는 항시 야무지게 접어두던 남은 껌 비닐 대신에, 먹고 남은 빵 비닐이 쪽지 모양으로 접혀서 얼마쯤 쌓여 있었다. 확실히 특이한 녀석이었다. 겉으로는 체계도 없이 어지럽지만, 자세히 보면 자기만의 정리 방식이 있다. 이 특색 있는 책상 주인을 생각하면서 이동 반 수업 때의 나는, 수업 대신 딴짓에 몰두했다. 교과서 페이지 모서리마다 책상에 붙은 스티커를 조금씩 따라 그렸다. 한쪽 손바닥으로 책을 가리고서. 이러다 보니 책상 주인에게 정이 들었다. 어쩌면 우린 어느 정도 닮은 면이 있는 듯했다. 항시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도 그날 하루에 특별한 기념품을 낙엽이라도 주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애도 어느 정도 그런 수집력이 있을 테다. 그러니 이렇게 바지런히 겹치는 스티커 없이 모아두지. 그런데 애는 대체 중복되는 스티커들은 어디에 두는 거지? 그냥 버리나? 이런 잡생각도 하면서 혼자 즐거워했다. 90년대에 성행하고, 나름 내 초등학교 시절에도 종종하던 마니또 게임처럼, 얼굴 없는 친구가 누굴까 내내 상상하듯이, 종종 새 빵을 뜯는 그 친구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오늘의 기억 어딘가에 판박이를 부치듯이, 이렇게라도 정말 내가 이때 있었음을 확인하려는 듯이, 손바닥에 열을 내고 불어서 최대한 반듯하게 접착 면을 붙이는 이는 수집가를. 그런데 아무래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왠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인제 그만 책상 주인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니 곧 그 자리에 앉는 일이 특별할 게 없게 됐다. 다시금 그날이 그날인 채로 별사건도 없는 가운데 어느새 2학기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나도 모르는 사이 새 습관이 생겼다. 등하굣길마다 스티커 빵을 사는 일, 본래 초콜릿은 좋아하지만, 빵은 싫어하는데도 샀다. 그 애처럼 스티커를 책상에 붙이지는 않았지만, 파일 속지 안쪽에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결국, 동네 길 냥이들이 보이면 쫓아가 빵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남아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베란다로 달려가 종량제 쓰레기통에 욱여넣는 신세가 됐다. 무언가 스스로 공포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느껴졌는데도 한동안 이 일을 지속했다. 처치 곤란하면서도 꽤 스스로 활력을 주는 이벤트라고 다독이면서. 

 하지만 곧 이마저도 곧 그저 그런 악몽으로 변해버렸다. 분명 처음에는 꽤 중복되지 않아 뽑기 운이 있었는데, 점점 랜덤으로 같은 스티커들이 번갈아 나오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이때부터 평소보다 서너 개의 빵을 더 사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매번 다른 스티커를 잘도 모아두는 그 애에게 샘이 났다. 대체 용돈을 얼마나 낭비하는 건지 혼자 씩씩대면서.

 그러던 어떤 날, 유난히 눈에 띄는 새 스티커가 있었다. 인쇄 상태며, 색깔이며, 들고 있는 아기자기한 소품이며 원하던 스티커 하나가 새로 붙어 있었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빽빽하게 많이 붙여놨는데 그 중 하나 없어진다고 신경이나 쓸까? 어차피 저렇게 많은데 별 상관없을 것도 같다고. 어느새 수업은 듣지도 않고, 손이 슬금슬금 책상 모서리에 붙여둔 씰을 끝에서부터 천천히 때어내 교과서 안쪽에 붙였다. 마침 종소리가 울리고 재빨리 일어나 매점으로 가는 친구를 따라나섰다.

이즈음 추석 연휴가 시작됐고, 일주일 가까이 학교를 쉬었다. 그 긴 연휴 내내 괜히 가져왔다고, 아무래도 바보 같은 충동이었다고 자책하며 보냈다. 결국, 도로 제자리에 붙여놓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이동 반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부리나케 그 자리로 이동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책상이 깨끗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스티커로 빽빽하던 그 책상이 웬일인지 깨끗했다. 혹여나 그 스티커 하나가 사라진 걸 알고서 화가 난 건가, 그래서 아예 다 때 버린 건가? 하필 내가 가져간 게 가장 아끼는 스티커라서 바로 알아챈 건가? 수업 시간 내내 연필을 굴리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 뒤로 알아보니, 책상 주인은 이미 예정된 대로 전학을 갔다 한다.

 이 시절 나는 나로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같이 긴 시간 기차를 타는 날이면, 차창 밖 풍경을 가만히 본다. 그럼 또 괜히 손이 심심해서 스티커 빵을 산다. 이제는 세대가 바뀌어서 너튜브에 나오는 펭귄이 대세다. 다양한 펭귄의 얼굴 스티커가 시리즈로 나오는데, 요새는 이거 모으는 재미에 빠졌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무언지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서둘러 뜯어보니, 학사모를 쓴 펭귄이다. 참, 별별 시리즈가 다 있다. 요새는 펭귄도 남극에서부터 멀리 건너와 졸업을 한다. 사각형 액자 안에 마름모꼴 판자가 붙은 학사모가 앙증맞다. 그것도 모자 꼭대기에 달린 술 밑으로 반짝이는 부리가 귀엽다. 뽑기의 시작이 성공적이다. 이제 딱 다섯 정거장 지나면 하나 더 뜯어봐야지. 그동안 좌석을 뒤로 좀 젖히고, 책을 꺼내 들었다.고향 집에 들르는 김에 휴가 기분을 내는 데는 역시 네겐 뽑기와 책만 한 게 없다. 이렇게 빵을 주워 먹으며 가다 보면 갑자기 허기질 일도 없고.

 기차야, 천천히 가도 된다. 나는 이제 일없다. 지루할 일이 하며 혼자 뿌듯해한다. 아메리카노 한 입,빵 한 입, 책 한 장 넘기며 가끔 움직이는 창밖 구경하면서 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잘 나온 스티커를 본다. 이 나이에도 작고 무용하지만 귀여운 것을 보면 마음이 들떴다. 이 기세대로라면 옆자리도 계속 비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괜히 출구 쪽을 유심히 보게 된다. 두 시간 가까이 옆자리에 사람이 타지 않았는데, 내 운이 얼마나 되나 궁금했다. 마저 운이 있기를 바라면서, 두 번째 빵 봉지를 뜯는다. 그런데 이번 스티커는 영 아니다. 뒷모습인데 나름, 그저 뒤통수다. 펭귄 눈,코,부리도 안 보이는데? 이걸 펭수라고 볼 수도 있나! 다시 신경질적으로 다음 빵을 뜯는데, 기이한 뽑기 운이다. 뒤통수에 이어 펭귄의 앞 통수가 나왔다. 이내 상황이 반전됐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섭하지만, 이젠 나름 세트다. 이제는 나름 들뜨기까지 해서, 약간 상반신을 들썩이며 들고 있던 책 안에 스티커를 끼어 두었다.

그간 뽑기에 온 기운을 집중하다 보니, 허기가 진 듯했다. 그만 빵이나 뜯어 먹으며 창밖을 보는데, 서서히 풍경이 느리게 다가오더니 기차가 멈춰 선다. 열차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타면서 누군가 옆자리에 들어섰다. 그것도 매우 특이한 사람이 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무려 책을 꺼내 든다. 이제는 멸종한 줄 알았는데, 굳이 이북도 아니고 종이책을 읽는 사람. 뭘 읽는지 표지라도 구경하고 싶어 옆을 힐끗거려보지만, 이 사람 북 커버를 쓴다. 뜬금없이 무슨 책이냐고 뜬금없이 물을 수도 없고. 

 우연히 알게 된 책은 제목을 일단 검색해 찾아봐야 하는 기이한 강박감이 있는 나는 혼자서 애간장이 탄다.이내 서너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 그 책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이제 열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저 멀리 플랫폼이 보일 즈음, 옆자리 그 사람이 전화를 받고 일어나, 책을 거꾸로 엎어두고 자리를 떴는데, 그래 이때가 기회다. 좀 괴상해 보이지만, 신속하게 북 커버 안을 살짝 들춰 책 표지를 확인할까? 혼잣말하면서 곁눈질하는 사이 책 주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다 무슨 저의가 있던 것을 대놓고 티를 내는 휘둥그레한 눈이 자리에 않는 그이와 마주쳤다. 나는 또 꼭 무슨 죄라도 지어서 황급히 손에 든 책을 무슨 지푸라기라도 붙잡듯이 들춰 올렸다.  건전하게 오직 독서에만 집중하는 중이었다는 듯이. 그런데 새삼 그 사람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건다?

“혹시, 그 책 사진집인가요? 제목이 특이하네요.”


침을 삼키고 태연한 척 대답을 했다.


“아, 네 이거 사진집이 긴한데, 짧은 에세이도 있고.”


“정말 뒷모습만 나오나요?.”


“아, 저도 표지 사진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해서 골랐는데, 여기 여자아이들 둘이 어깨동무한 뒷모습 사진이요. 엽서 같은 데 많이 본 사진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저도 어디서 본 한데, 잠시만요. 여기 사진작가가?.”


“ 사진은 에두아르 부바요.”


“아! 이 분, 사진전. 국내서도 많이 열리지 않았나요? 지금 보니 예전에 시립 미술관서 봤던 것 같아요!. 어,이거요. 이 고양이 창가에 앉은 뒷모습이요!”


 다시 기차가 움직이고, 나는 또 미리 바보 같은 고민을 했던 것이다. 누구 묘지명처럼 우물쭈물하다 네 이럴 줄 알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어볼 걸. 종목이 같은 덕후는 서로 통하는 법인데. 오늘도 혼자서 속으로 어설픈 시나리오를 짰다. 이건 뭐 재미도 감동도 없는 애간장을.

 곧 책 주인이 북 커버를 때고, 자기 책을 건네주었다. 자기는 헌책방에서 랜덤으로 골라 본다고, 최대한 괴상한 제목을 찾으면 뽑기 운이 좋을 때가 있단다.


 G.H에 따른 수난? 


 G. H는 또 누구의 약자인가? 나는 어느새 그 책을 건네받고. 본문 어딘가를 읽게 됐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마침내 실망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아전의 나는 나에게 이롭지 못했다그러나 그 이롭지 못함으로부터 나는 최고의 것을 거두었다.

 

 그것은 희망이다스스로 불행으로부터 미래를 위한 덕을 만들어냈다그렇다면 지금 두려움은내 새로운 존재 방식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가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매번 일어나는 일에 나를 맡겨두면 왜 안 되는가?

 

나는 우연이라는 성스러운 위험을 감수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운명을 개연성으로 대체하게 되리라.”


그새 또 한참 갔나보다. 기차는 또 다른 플랫폼 앞에 멈춰 섰다. 몸이 앞으로 쏠리고, 승객들이 일제히 소지품을 챙기는 뒤척임이 느껴진다. 옆에서 내 책을 골똘히 보던 그이가 자기 가방에서 주섬주섬 귤을 꺼내준다. 좋은 책 보여줘서 고맙다고, 자기는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그렇게 서로의 책을 맞바꾸는데, 속지에서 꽂아뒀던 스티커가 떨어졌고, 그 이가 재빨리 집어서 다시 내게 건네줬다. 그러고는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는 문득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혹시 스티커나 우표 같은 거 모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던 그가, 곰곰이 생각하다 웃으며 말했다.


“아, 예전에 늦바람이 들어서 막상 애들이 모을 때는 관심 없다가, 중학교 때  뒤늦게 뭐.

 그 빵 스티커 있잖아요. 그런데 사단이 났죠. 뭐든지 늦바람이 무섭다고”


“무슨?.”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풀었다.


“아 그때 초등학생인 조카가 그 스티커를 수집가 마냥 모으는 거에요. 앨범에 쫙, 그것도 깔별로. 그래서 명절 때 집에 있던 딱지로 많이 바꿔 먹었죠. 그 녀석은 같은 종류도 서너 개씩 가지고 있으니. 뭔가 제가 교환하면서도 손해 보는 것 같았어요.좀 서비스도 주고 그러지. 얄짤 없던데요.”


“사촌 동생이 프로 컬렉터였네요. 우와.”


“그러니까요.그놈 이젠 건담을 모아요.프라 모델.”


“어? 스케일이 더 커지셨네요. 건담 팔 하나만 부러져도.”


“그죠, 장난감도 입이 벌어지던데요.가격 들으면 아주. 근데 그놈이 또 손이 야무져서 관리를 잘해요. 아, 예전에도 저한테 스티커 한 장 서비스로 안 줬어도, 대신 동네 밭에서 서리를 해줘서 그거 종종 얻어먹었었죠. 어른들 나가시면 서리한 고구마 조금, 감자 조금 군불에.”


“서리요? 오랜만에 듣는 말이네요. 와 서리.”


“아, 네. 저희 큰댁이 시골에 있어서, 주변이 다 밭이었어요.”


예기치 않게 기분 좋은 환담으로 이어진 대화가 흐르고 흘러 책을 맞바꿀 때 떨어졌던 펭수 스티커에도 갔다. 내친김에 그에게 펭수 채널도 보여주었다. 이거 출퇴근길에 보면 힐링 된다고.


“아! 아까 이게 개구나. 요새 핫한 펭귄.”


“맞아요. 스티커도 나온다니까요.그럼 대세인 거죠.”


“그러네요. 하긴, 유행은 돌고 도니까요. 아, 진짜 예전에 열심히 모았는데. 물론 그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이사 가면서 다 없어졌어요”

순간, 섭섭한 듯 두 손을 비비며 창밖을 본다. 하기야 원래 이사하다 잃어버린 물건은 유독 아쉽다. 막상 지금까지 들고 있었으면, 본가에 부모님 등짝 스매싱을 받고 현타 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요즘 대세인 미니멀 라이프 조성을 위해 진작에 시원하게 버렸을 테지만서도.

 슬슬 산보다 건물들이 많이 보여 오면서 이젠, 창밖으로 역전이 가까워지다 못해 다음 역에 도착해 버리고, 순간 나는 무슨 변덕이 나서 내가 오늘 뽑은 스티커를 불쑥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럼 이거요, 가지세요!”


순간 상대는 의아하게 쳐다보고, 나는 또 나대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뜬금포 양도에 합당한 근거를 갖다 붙이려 애를 썼다.


“요새는 포켓몬 말고 애가 대세잖아요. 방금 빵 먹다가 연속으로 나온 건데, 그것도 앞, 뒤 세트로요. 나름 뽑기 운이 좋은 거니까, 나름 행운의 스티커죠. ”

말만 미주알 고주알이지, 역시 급조해 별 영양가 없는 주저리지만, 다행히 상대가 들뜬 표정으로 웃었다. 어쩌면 이 공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생긴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뭔가 있어 보이니까.


“이야,. 이거 희귀템 같은데, 제가 정말 가져도 돼요?”


“전 또 뽑게요. 빵 먹느라 살이 쪄도 뽑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그럼, 저도 이참에 다시 모아 봐야겠네요. 고마워요.”


그는 스티커를 북 커버 안감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 놓는 듯하더니,스티커를 하나씩 떼어서 책 커버 앞뒤로 붙였다.  요새 핫한 펭귄 앞모습,뒷모습 짝 맞춰서.


 이내 내 옆자리는 다시 비고, 기차는 정각에 움직이고, 나는 무언가 개운한 마음에 기지개를 켜고 좌석에 등을 완전히 기댔다. 


 뭐, 얼렁뚱땅이지만 어쩌면 훔친 스티커를 이참에 돌려준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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