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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어느날 Oct 19. 2024

서른다섯의 나 (4) _ 도망치듯 퇴사하면 나아질까?

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는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나의 마음은 조급함에 사로잡혔다. 하루에도 내 안에서 몇 가지 자아가 돌아가면서 나타나, 미래를 위한 각각의 충동적인 계획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을 버티면서 서서히 나의 무기를 만들어가자는 이성적인 자아가 나를 설득했다가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도전을 하겠냐며 한 번뿐인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해보자는 감성적인 자아가 순식간에 나를 지배하기도 했다.  


사실 새로운 도전을 갈구하는 내 자아에 마음이 더 가는 건 사실이다. 이유는 꽤나 분명하다. 그 자아는 지금까지 내가 포기해 온 것들에 대한 후회와 미련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모습으로 살게 되기까지 내가 해온 선택들, 그 과정에서 포기해야만 했던 많은 다른 길들이 한꺼번에 내 앞에 펼쳐졌다. 지금이 그 길들을 다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시도 때도 없이 속삭였다. 


먼저 대학원. 나는 영문학 교수가 되고 싶었다. 평일에는 영어학원 강사를 하고 주말에는 과외를 하느라 캠퍼스 생활을 즐겨본 적이 없지만, 영어영문학 전공수업은 전부 1~2등을 할 정도로 영문학을 좋아했다. 작품을 읽는 것도, 에세이를 쓰는 것도, 그 시대를 온전히 느끼며 작품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도 너무 좋았다. 그렇게 문학을 즐기는 나를 보며, 교수님 또한 미국으로의 유학을 여러 차례 권유하셨다.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넌지시 거절을 표하면, 장학금을 위한 추천서도 써주겠다고까지 말씀해 주셨다. 20대의 어렸던 내가 품은 '성공'에 대한 가치관, 돈을 벌어 내 부모 내 가족은 부양하겠노라 다짐했던 일말의 책임감에 나는 작은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피트니스산업으로의 전직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19살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운동은 내 인생의 최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지금도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려서부터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이 초보트레이너로 시작하여, 이제는 대형 피트니스센터 사장 혹은 풍부한 해부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로 업계에서 자리 잡고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참 많이 부러웠다. 3년이면 풍월을 읊는 서당개처럼, 나도 십수 년을 같이 운동하며 트레이너를 해본 경험도 있고, 관련 지식도 꽤나 풍부하게 쌓았다. 영어 강사를 하는 동안 얻은 목디스크와 굽은 자세를 운동으로 치료하면서 그리고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늪에서 운동의 힘을 빌려 빠져나온 경험을 해보면서, 나는 언젠가 재활운동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작은 목표를 마음에 품었다. 평생 노력하는 만큼 성장하며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는 이 길에 대한 욕심이 다시 한번 샘솟았다. 




회사에 있는 시간 내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퇴사에 대한 충동은 점점 강해졌다. 앞으로 살아갈 날은 많은데, 처자식도 없는 지금이야 말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참 우스운 것은, 또 그러다 한순간에 차가운 이성이 눈을 떠서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잠시잠깐 온전한 판단력을 지닌 나로 돌아와 나 자신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지금 회사를 떠나고 싶은 것이 정말 순수하게 새로운 도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지친 몸과 마음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따갑게 이야기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퇴사를 저지를 만큼, 지금의 현실이 한 점 희망도 없는 상황인지 냉정하게 판단해 보라며 질타했다. 대기업이 주는 많은 장점을 활용한 퇴사 전략을 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정녕 도피가 아닌 나를 위한 길인지 솔직하게 대답해 보라고 차갑게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너무 아파서 살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던 3년 전의 나만큼,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내 마음이 절망적인지 진단해 보라고 조언했다. 


나에 대한 정확하고 냉정한 진단이 필요했다. 여러 자아가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동안 잘못된 판단들이 쏟아져 나올 테니까. 그래서 상담선생님한테 모든 것을 공유했다. 나도 내 상태를 정확히 모르겠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생각에 나도 혼란스럽다고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난 후, 꽤나 놀란 듯 말했다. 


"청년의 가치관과 방향은 여전히 확고하네요. 그리고 상황 또한 변한 게 없죠. 아니, 오히려 좋아진 것이 아닐까요? 첫 번째 도전했던 온라인 사업은 멈췄지만, 그것으로 벌었던 수익보다 더 많이 월급이 올라갔죠. 그리고 경험은 풍부해지고 다른 시장이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오히려 성장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왜 더 조급해졌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도 궁금했다. 내가 왜 이렇게 초조해하고 조급해하는지. 그리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때보다 전 3살이 많아졌고, 시간이 많이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리고 온라인 사업에 성공해서 퇴사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실패했다는 생각도 지워지질 않네요. 그래서 급한 가봐요. 3년 전보다 더 빨리 성과를 내서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멈추기가 힘들어요."


선생님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요, 청년이 3년 전에 조금씩 의욕이 살아나고 건강해지고 있을 그때, 저한테 상담 때마다 하던 말이 있어요. '실패는 디폴트죠, 될 때까지 시도하려고요.'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애초에 한 번에 성공하려고 온라인 사업에 도전한 게 아니었어요. 물론 성과가 눈에 보이면 욕심이 생기고,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만 보이면 조급해지죠. 근데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성공한 사람들만 내 눈에 보여서 그런 거... 아시잖아요?"


또다시 맞는 말. 신조처럼 가슴에 품었던 '실패는 디폴트'라는 말도 잊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어서 말했다. 


"회사 생활 자체만 놓고 보면, 이전과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애초부터 회사일에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은 하지 않기로 한 거고, 내 미래를 위해 에너지를 아끼고 다른 시도를 하는 것 또한 여전히 유효한 거죠. 한동안 행복감을 느끼고 회사에 다시 집중했던 기간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에요. 스스로가 성숙해지고 행복했었던 소중한 시간이죠. 회사 생활을 내려놓기로 다짐한 청년이... 회사에서 죽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건... 아직 못 내려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왜 이렇게 맞는 말만 하는지. 항상 정서적으로 따듯하게 보살펴주던 선생님인데 이번만큼은 좀 매서웠다. 


"더 많은 경험, 넓어진 시야로 다른 시도를 하는 동안 회사를 충분히 안전장치로써 이용할 수 있는 상황 아닐까요? 지금 혼란스러움은 어쩌면, 회사에서 다시 한번 태웠던 불꽃이 꺼지면서 좀 쉬어가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네요. 그럼 3년 전 그때처럼 다시 회사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청년은 여전히 의욕이 있고 분명한 계획이 있어요. 제어할 수 있는 조급함 때문에, 도망치는 듯 퇴사하면... 나아질까요?"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엇나가려는 나를 잡아주는 듯한 조언들을 곱씹으며 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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