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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어느날 Oct 13. 2024

서른다섯의 나 (2) _ 현실로 돌아갈 시간

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23년 한 해는 회사원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한 해였다. 발탁 승진으로 한 해를 시작했고,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동료들과의 좋은 관계 형성이 나를 힘나게 했다. 좋은 상사를 만났고 좋은 동료를 만나 힘들게 일해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인정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한 회사 내 새로운 인간관계들도 많이 생겨났다. 입사 후 처음으로 SS 고과를 받으며, 믿기지 않는 고액의 인센티브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했다.  


이상하게도, 기쁘긴 했지만 부담이 더 컸다. 이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일궈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만큼, 눈앞에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조직 내 30명 전원을 성향과 나이, 친밀도에 맞게 그루핑 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었지만, 그때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선의 방법이 식사 대접이었다. 이 모든 판을 깔아주고 행복을 경험하게 해 준 상무님에게 제일 먼저 고급진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그 후 한 달에 걸쳐 동료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계속되었고, 내가 받은 보상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고마움을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하게 좋았다. 


하지만 회사 생활에 충실할수록 나의 사업은 서서히 우하향을 하고 있었다. 1년 반 동안의 노력이 들어간 덕인지, 주문은 꾸준히 들어왔다. 하지만 들어오는 주문만 대응할 뿐, 새로운 업데이트가 되지 않으니 매출은 당연히 점점 감소했다. 씁쓸했지만, 회사에서의 행복을 충분히 경험하기로 선택한 이상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회사 생활 외의 모든 시간은 독서와 운동으로 채웠다. 살인적인 업무량과 긴 업무 시간으로 인해 자세는 항상 망가져 있었고, 잦은 회식 및 음주로 인한 피로는 하루하루 나를 늙어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는 가끔씩 예전 아팠을 때의 나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주었다. 그래서 주중에 적어도 하루, 주말은 내내 헬스장에서 살았다. 회사에서 가끔 느끼는 행복감이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온전히 대체할 수는 없으니, 나에게 운동은 살기 위한 수단과도 같았다. 그래도 많이 먹는 만큼 많이 운동해서 그런지 몸도 커지고 힘도 세지는 나름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책은 습관처럼 읽었다. 여전히 내 생활 반경에서 내 생각에 공감해 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모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독서를 해야만 했다. 지금 이 행복에 젖어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용기와 자신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의 힘이 필요했다. 




'24년을 맞이했다. 정책이 바뀐 덕에 나이도 한 살이 줄어들었다. 회사에 정착하지 못하고, 탈출을 위해 이것저것 하던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진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런 내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사는 날 그룹사 핵심 인재에 선발하여 관리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상무님이나 팀장님들은 나에게 축하와 함께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가 뒤에서 힘 많이 썼다.', '내가 인마 너 칭찬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 술 사.', '앞으로 팀장 달고 높이 올라가려면 더 잘해야지, 그렇지?', '너 이렇게 까지 해줬는데, 딴 데로 도망가면 안 된다.'와 같은 말들에 나는 그저 감사하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 이제는 곧 다른 조직으로 이동을 시키겠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곧 인사이동이 현실이 될 것처럼 느껴졌다. 인사팀 담당자가 상무님의 방에 들어갈 때면, '혹시 내 이야기하는 걸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언제까지 여기서 주무 업무만 할 거야?'라는 주변 동료들의 말을 들을 때면, '아 내가 오래 하긴 했나 보구나.'라는 불안함이 찾아왔다. 그래서 준비해야 했다. 이 행복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견뎌낼 준비를. 변하지 않은 나의 목표인 '퇴사'를 위해, 이전보다는 조금 성숙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해야만 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점심시간, 같이 식사를 하던 도중 상무님이 뜬금없이 나에게 말했다. '야, 이제는 너를 다른 팀으로 보내야 한다는 요청과 압박을 내가 막기가 힘들어졌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음의 준비하고 있어 봐.'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계속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가 까라면 가야지 뭐 내 욕심에 참 오래도 버텼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름의 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에 이런 말을 들으니, 모든 사고 회로가 멈춘 듯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상무님은 식사 후 나를 불렀다. '이번에 본부장급부터 조직 전체적으로 다 물갈이를 할 건가 본데, 기획팀이 다 바뀐단 말이지. 거기에 새로 오는 담당이랑 팀장이 다 우리 쪽 사람이잖아. 인사에서도 또 찾아와서 너 보내라고 하는데, 새로 만들어지는 판에 합류하는 건 너한테도 좋아. 다 친한 사람들이 와서 요청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거절을 못하겠더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상무님은 내가 회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퇴사를 위해 뭘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저 열심히 하는 구성원 하나 잘 키워줬을 뿐인데, 받기만 한 내가 안 가고 싶다고 징징거릴 순 없었다. 그래도 남은 미련에 한 마디는 했다. '올해 나름대로 우리 담당 조직을 위해 계획한 게 있고 목표 설정도 끝났는데, 지금 가는 건 너무 아쉽습니다. 올 해까지만 있고 싶은데...'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남은 시간은 1주일 정도였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온 변화에 내 모든 것이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흔들리는 멘탈을 최대한 다잡으려 애썼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라는 상무님의 말에, 나는 고민도 없이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와 걷고 또 걸었다. 아직 마음이 준비도 안 됐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행복은 끝났다.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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