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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생 Sep 23. 2016

자존심은 나쁘고 자존감은 좋다?

문화적 개념과 학술적 개념의 차이

시대가 힐링의 시대다 보니 여기저기서 남을 치유해 주겠다는 소위 '힐러'들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후죽순으로 돋아나는 그 힐러들이 헬조선의 전사(?)들에게 과연 얼마나 힐을 잘 해줄 것인가와는 별개로.. 그들이 사용하는 심리학적 개념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학술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정신의학적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는가 하면 충분한 학술적, 임상적 근거가 없이 여러 개념을 혼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무래도 상담소나 병원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전문가보다는 힐링이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얼치기 힐러들이 많다보니 인터넷과 1인매체라는 기술의 진보를 등에 업고 이러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나으 힐링 구슬을 받아랏!

친구나 지인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따뜻한 말 한마디 주고받는 일상의 힐링이 아닌, 정신의학과 심리학적 개념을 이용한 정신치유는 고도의 훈련과 임상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짧은 글에서 잠시의 안식을 얻으시는 것도 좋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가치있는 정보를 걸러내는 안목도 반드시 갖추시기 바랍니다. 


저는 문화심리학자로 임상이나 상담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현재 힐링계에 통용되는 개념 중에 심각하게 오염된 문화적 개념이 있어 오늘은 그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것은 '자존심'과 '자존감'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

언제부턴가 인터넷 곳곳에 '자존심은 버려야 할 나쁜 것이고 자존감은 키워야 할 좋은 것'이라는 명제가 눈에 띕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틀린 소리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잘못된 얘기입니다.

누가 그러던가요?

자존심(自尊心)은 한국문화에서 발달한 문화적 개념입니다. 즉 한국사람들이 일상에서 구어로 사용하는 용어이자 개념입니다. 반면에 자존감(self-esteem)은 심리학에서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로젠버그(Rogenberg, 1965)라는 학자가 정의했으며 오랫동안 많은 연구를 통해 다듬어진 학술적 개념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개념을 단일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불성설입니다. 말이 안된다는 얘깁니다. 더구나 한쪽은 좋고 한쪽은 나쁘다니요. 그 근거는 무엇이랍니까? 참으로 그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거 말이죠. 꼭 있어야 하는 건데.. 그 참.. 어디다 뒀더라?

제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제가 '자존심'을 연구한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구한 바에 따르면 자존심은 학술적 개념인 '자존감'의 문화적 형태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한국문화적인 방식이 자존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존심과 자존감을 비교하는 것은 비교 대상이 아닌 동일 범주의 개념을 비교하는 오류인 것이죠. 쉽게 말씀드리면, 

자존심은 나쁘고 자존감은 좋다는 주장은 '한복은 나쁜데 옷은 좋다'는
주장과 동일합니다.


한국의 문화적 개념인 자존심과 비교가능한 것은  pride 같은 문화적 개념 뿐입니다. pride가 미국문화에서 미국인들이 자존감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말이죠. pride 개념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아직 없습니다. 


자존심은 나쁘고 자존감은 좋다? 

이렇듯 잘못된 범주를 비교하는 데서 한 술 더 떠서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다는 가치가 포함된 이런 주장은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맥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존심은 자존감을 경험하는 문화적 방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지만 문화에 따라 벽돌집, 흙집, 판자집, 이글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은 집이 있듯이, 자존감이라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보편적인 심성이 있는데 그것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자존심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타인으로부터 침해당하면 심한 경우에는 살인도 불사하지요. 그래서 한국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분에 넘치는 허세를 부리거나 말도 안되는 객기를 부리기도 하지요.


아마도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쓸데 없어 보이는 자존심 지키기에 대한 힐러들 개인의 경험들이 '자존심은 나쁜 것'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존심에는 그러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이유 때문에 더 큰 것을 잃거나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손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의 의미는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 언급된 경우는 자존심이 부정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자존심에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을까요? 세상 모든 일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지요. 긍정적인 면에 눈을 감고 부정적인 면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왜곡입니다. 자신의 주장에 맞는 증거만을 찾으려는 인지적 편향의 결과인 것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부정적인 일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자존심이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동기가 있으니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태도까지 나타날 수 있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개인적 성숙이나 여러 상황적 조건에 따른 편차가 존재합니다. 


자존심을 찌질한 열등감의 발로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성숙한 내면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데 사용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문화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맥락에 따른 의미들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존심은 한국인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줍니다. 사는 게 힘들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붙잡을 자존심이 한 가닥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더 나은 결과를 향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일본말로 곤조(根性), 미국의 문화적 개념으로 grit라는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자존감(self-esteem)을 유지하려는 동기와 관련된 그 문화의 개념일 것입니다. 학술적 개념으로는 자기탄력성(self-resilience)이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존심은 빅터 프랭클이 이야기한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돈도 안되고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지만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을 지탱하는 것은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존심일 것입니다.

돈이 안돼도 내가 가진 기술을 이어가겠다는 장인의 자존심, 초가삼간에 살면서도 고관대작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선비의 자존심. 감옥에 갈 지라도 펜을 굽히지 않는 언론인의 자존심. 평생을 시간강사로 떠돌지언정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지키는 학자의 자존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이들은 자기의 일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현재 한국이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유는 선비들이, 언론인들이, 학자들이 자존심을 내팽개쳤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 아직도 자존심은 나쁘고 자존감은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자존심은 자존감의 한 형태입니다.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옷과 한복', '음식과 짜장면', '악기와 피아노', '스포츠와 축구'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웃기는 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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