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 6
삶이 힘들게 할지라도, 덕질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2019년은 팀이 바뀌면서, 회사 일이 무척 바빠졌는데 일주일 내내 회사일에 에너지를 쏟고 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었다. '현생'에 치이고 치였지만, 퇴근하고 하는 덕질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트위터나 유튜브 같은 관련 앱의 사용시간은 내 핸드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 이래서 반려동물을 키우고 자식을 낳는구나 싶기도.
신기하게도 그 마음이 더 줄지 않았다. 제대로 아이돌을 좋아한 것이 처음이라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냥 그 그룹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최애가 속한 그룹이라 애정을 가졌는데 점차 이 그룹 자체의 모든 친구들을 응원하는 ‘올팬’ 이 되었다.
그룹은 어느새 두 번째 미니 앨범을 발매했고, 실력도 점차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쓰러질지라도 무조건 간다 콘서트
드디어 첫 번째 콘서트가 개최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예매는 쉽지 않았다. 팬클럽에 예매 우선순위가 있었는데, 나는 1기 팬클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기 팬클럽 모집 때만 해도 여전히 ‘에이 그 정도까지’ 라며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2기는 가입했으나 코로나 여파로 전혀 혜택이 없었다. 온라인 콘서트는 모든 사람이 1 열이었으니...) 그래서 이런 마음이 생겼다. 솔직히 자리도 그렇고 혼자 가기 뻘쭘하기도 하고 가지 말까? 그때 나는 제대로 덕밍 아웃도 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기에 걸그룹 콘서트를 가는데 함께 하겠냐고 물어볼 주변 친구, 동료도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이걸 놓쳤다가는 갔다 온 사람들을 만년 동안 부러워서 하면서 눈물 흘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날 회사에서 친한 동료들과 밥을 먹다가, 며칠 뒤에 콘서트가 있는데 갈까 말까 고민이라고 얘기했더니 당연히 가야 한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다행히 제일 위층인 3층 자리가 비어있었고,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예매를 했다. 내가 지금 돈이 없냐 시간이 없냐!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콘서트 1주일 전 갔던 해외출장에서 겪은 (스트레스로 인한)위경련과 장염... 등 후유증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여러 여파들 때문에 몸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또다시 쓰러지더라도 눈으로 담고 와야지 싶었다.
자유로운 세계
콘서트는 3일 동안 열렸는데, 내가 간 것은 첫 번째 날(첫콘)이었다. 당일날은 소풍 가는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설레서 잠이 잘 안 왔다. 콘서트장 가는 길은 설레기 마련. 스탠딩석 입장이 있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던 모양인데 공연 1시간 전쯤에 여유 있게 도착해서 공식 응원봉을 산 후 세팅을 하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3층이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다. 옆에 앉았던 귀여운 여덕 친구와 말을 트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로 나와 최애가 같아서 더 편하게 보았다. 2시간이 훨씬 넘게 이어지는 콘서트였으므로 당이 부족했는데, 자신이 가져온 과자도 나눠주는 착한 친구였고, 아 이래서 '덕친'을 만드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앞에서 움직이는 최애를 보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고, 그냥 숨만 쉬워도 재밌었을 텐데 멋진 공연까지 볼 수 있으니 정말 행복했다. 나는 그곳에서 같은 그룹을 좋아하는 덕후들과 함께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 망할 체면을 날려버리고 맘 놓고 소리를 지르며 자유를 만킥했다.
콘서트와 양가감정
콘서트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9:1 혹은 8:2 정도가 되는 성비였다. 이미 예상을 했고, 걸그룹의 특성상 남자팬이 많은 그룹이 많긴 하지만, 걸그룹들도 어떤 콘셉트로 활동하느냐에 따라 팬들의 성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시즌 1,2에 비해 마니아층이 즐겨보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했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들지만.혹자는 그들이 '정통 걸그룹'의 길을 간다고 했는데(정통 걸그룹과 남초 팬덤이 무슨 관련 일지), 대체 '정통 걸그룹'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갸우뚱하게 된다.
온라인 상에서 어느 정도 가려질 수 있었던 것이 오프라인에서는 확연히 드러났다. 나이도 10대부터, 정말 고령까지 다양했다. 당연하겠지만 함성소리의 굵기도 정말 놀랄만했고. 옆자리의 그 친구를 제외하고는 주변의 많은 관객들이 혼자 온 남자 관객이었다.
콘서트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지만,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여덕으로서의 현타가 온 것이다.
팬들은 아이돌이라는 대상을 다양하게 소비하고 있었는데, 유사 연애대상부터 시작해서 워너비, 부모의 마음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욕망들을 가지고 아이돌 산업을 굴러가고 있었고, 기획사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프라이빗 메일 같은 유료 메시지 앱들을 쓰며 대부분의 팬들은 진짜 아이돌과 소통하며 일상의 즐거움으로 이를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것을 실제 연애라고 착각하고, 아티스트들에게 자신과 같은 감정이길 강요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가 최애를 바라보는 감정과 저들이 바라보는 감정은 다르겠구나. 자기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듯한 중년의 남성이 16살 막내 멤버의 어머니를 얘기를 하며 '장모님'이라고 지칭하며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것은 더 확실해졌다.
나도 그냥 이 산업의 동조자가 아닌가? 나라고 뭐가 다르지? 라는 생각이 온몸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