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무언가를 한다는 것
언제부턴가 우리가 하는 많은 행위 앞에 '혼' 자가 붙기 시작했다.
한때는 부러움 혹은 그 반대의 동정의 시선을 받았으며 무용담처럼 여겨졌던, 혼자 식당(특히 고깃집 같은)에서 밥을 먹는 행위나 술을 마시는 행위 등이 이젠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1인 가정이 증가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전염병이 만들어낸 비자발적인 고독으로 인해 혼자 집에서 하는 것들이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된 것 같다. 일본 드라마 속 인물들이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 행복하고 혼자 식사나 음주를 하는 것들이 이젠 이국적으로 보이는 시대는 갔다.
예전에는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어려워했다.
술이라면 많이 먹는 게 최고인 줄 알았던, 넉넉치 않은 대학생 시절엔 친구들을 자취방에 불러 가장 빠르게 취할 수 있는 소주를 다른 액체(주스나 탄산이나 또 다른 술이나)와 섞어 마셨다. 안주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내장기관의 비명은 무시한 채 말이다. 함께 마실 친구가 있다면 술은 언제나 오케이였지만, 그렇지 않으면 술이 먹고 싶더라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물론, 스무 살 남짓할 때는 우린 술에 있어서는 언제나 관대했고, '콜' 하면 그냥 먹는 것이었다. 신입생 때 선배들에게 처음 배운 '주도'는 술의 첫 잔은 원샷이며, 상대가 주는 술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이며, 술은 상대를 독려하며(술을 질러가며)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되었던 우리는,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나 어렸던 스물한두 살짜리들의 말을 경전처럼 따랐다.
함께 술을 붓던 친구들은 각자가 바빠졌다.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누군가는 외국으로 떠났다. 스무 살 때만큼 무지성으로 술을 붓지는 않게 되었으나 때로 만나 술을 마셨는데 그간의 공백기를 채우려는 양 '중간' 은 없었다. 언제나 내 안의 진심을 토해내고, 현실의 문제가 혈중 알코올 농도가 올라가면 갈수록 지워지고, 서로 다음날 기억나지 않을 유난스러운 눈물의 대화를 나눌 때까지 마셨다.
어른의 술
그렇게 친구들과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갔다. 각자의 타임라인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지만, 술꾼임을 숨기지 않던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했던 것처럼 마실 기회는 줄었다.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마시고, 술과 함께하는 자리들을 겪었다. 술은 애초에 누가이기나 내가 이기나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적당히 취할 때까지'만 즐겨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르는 것' 이 아니었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난 후로부터는 혼자서도 술을 마시게 되었고, 모든 일과를 끝내고 집에 와서 들이키는 맥주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시원한 맥주의 첫 모금은 분노와 갈등이 사라지고 세계평화를 바라게 되는 그런 맛이었다.
아마도 뻔한 정의일 수도 있지만, 혼자 술을 먹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의 동의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본연의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술이 주는 위로를 기꺼이 즐기된 것이다. 혼자 술을 먹는 행위는 고독과 외로움을 인정한다는 선언이다. 스무 살, 자유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집착하고 탐했던 술에 대한 마음가짐이 변화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