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땡기는 순간

뻔한 술 이야기 - 10

by 시그리드

술이 땡기는 순간 - 조건 세 가지

'술이 땡기는 순간'은 몇 가지 조건들이 성립해야 한다.

환경(날씨, 다음날 일정 여부, 시간적 여유, 술을 팔거나 술이 있는 장소), 사람(이전에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알코올을 통해 얻은 솔직함을 나누었다든지, 비록 마셔본 적은 없으나 각자가 품은 다른 세계를 슬쩍 보여주고 싶다던지, 나 혼자여도 괜찮다던지), 기분이 그 조건들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 건 아니고, 가끔은 한두 개만 충족되어도 된다.

이중에서도 '기분' 은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장 강력하다. 즉,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라는 거다. 화나거나, 짜증 나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외로울 때면 술 생각이 난다. 상사 욕을 너무 하고 싶을 때, 승진에서 누락되었을 때, 좋아하던 아이돌이 해체되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았을 때, 친구가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했을 때, 동생이 시험에 붙었을 때 ‘아 술이 땡긴다' 라고 읊조리게 된다. 사실 그냥 내 마음이다…


기분이 까맣게 탈 때, 흑역사가 탄생한다

문제는 기분이 까맣게 별로일 때다. 그럴 때, 술을 마시면 매우 높은 확률로 처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그럴 때마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숙취와 어젯밤 술자리에서의 뼈아픈 기억(이거은 사라지고, 누군가에 의해 듣거나 -“야 너 괜찮아?”라는 문자가 와있으면 굉장히 당혹스럽다-아침에 일어나서야 상황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것을 기억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들을 전리품처럼 얻었다.


앞이 보이지 않던 취준 시절에 서류에서 논술에서 면접에서 떨어지고 매화수에 소주를 1:1로 섞은 끔찍한 폭탄주를 마시며 흑역사 몇 개를 적립해나갔다. 단 하루라도 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무능한 팀장과 함께한 술자리에서는 혼자 소주를 급하게 들이켠 후 우리 팀은 왜 항상 욕먹어야 하느냐며 속에만 품던 얘기를 면전에 소리치기도 했고. 한참 뒤늦게 짝사랑 비슷한 것을 할 때는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를 맹수처럼 잡아채며 다음날 움직이지 않는 사냥감(나)을 보고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갑, 핸드폰(그것도 두 번 연속) 온갖 인간적이고 고귀한 요소들을 내팽개쳤던 경험이었다.


누가 억지로 마시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마시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라 탓할 사람이 없다는 점도 낭패다.

술을 마신다고 해봤자 과음의 원인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술 땡기는 마음은 또 불쑥불쑥 나타나기 마련이다. 약이 아니라 독이나 다름없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 매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분명 비극이 될 것인데 감당할 수 있겠니?라고.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중 가장 레벨이 높은 것은 우울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란 건 부정할 수 없다. 나혼자 삭이고 감당하기엔 버겁기 때문에 술로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아보려는 발버둥같은 것이다.

오늘도 다짐한다. 가장 술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술을 마시자고. 그러면 너의 흑역사를 방치하던, 이성이 얼마나 똑똑하게 제어를 하는지 볼 수 있을 테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