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구조대

뻔한 술 이야기 - 21

by 시그리드

오랜만에 대학 친구 L을 만나 술을 마셨다. 스무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L과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어제 본 것 같이 친근하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웬만하면 술을 마시게 되는데,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항상 먹다 보면 흥이 오르고 기분이 좋아져서 2차 3차까지 가고는 했다. 근 몇 년간은 우리가 주량이 줄기도 했고, 현재의 흥보다는 다음날의 출근이 더 신경이 쓰이는 나이가 되었으며, 10시든 11시든 국가가 정해준 통금시간 덕(?)에 자제를 하게 되었다.


이번 만남도 처음 시작한 와인바에서 와인, 맥주, 보드카까지 여러 종류의 술을 '적당히' 마시고 가게 문을 닫는 시간에 맞춰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우리 예전보다 많이 자제한다는 셀프 칭찬도 덧붙이면서)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지점 옆에 철퍼덕 앉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를 보게 되었다. 좀 앳되보여서, 학생이 아닐까 짐작이 되었는데. '아, 지금이 3월이지.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되고, 대학생이라면 응당 즐겨야 할 것 같은 술을 의무감 인지도 모른 채 들이붓는 그 시기!'라는 생각이 스쳤다.


돌이켜 보면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셨던 스무 살의 밤. 우리는 여전히 차가운 초봄의 밤들을 알코올을 취한 채 보냈다. 왠지 수많은 흑역사를 찍어내며 그 시기를 지나온 '술꾼 선배' 로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았다. 신입생인지 아닐지 알 수 없고 잘못된 지레짐작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적인 걱정과 더불어서 술꾼으로서의 부채감 때문이었다. 경찰에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지하철 역사 사무실에 말씀을 드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직원분들이 계셨고 상황을 설명하니,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일인 듯 재빠르게 출동했다. 그 친구가 있는 곳에 함께 가려고 하니 자기네들이 알아서 할 테니 집에 가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너무나도 호쾌하고 능숙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멋졌다. 멀리서 보니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몇몇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있었다. 다들 걱정이 되어 그냥 못본채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문득 나 또한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술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에 몸 성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된다. 민폐라며 혀를 끌끌차고 무시할 수도 있었을텐데, 걱정을 나눠주었던 사람들. 운이 좋게도, 그들 덕에 멀쩡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혼내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고, 아찔했던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해 이성을 거치지 않고 뱉은 말들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 온갖 똥 멍청이 같은 짓들도, 취하지 않거나 조금 덜 취한 누군가는 수습을 해야했다. 그 후로 정작 "기억이 안 난다"를 시전 하며 제대로 된 사과나 고마움을 전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늦었지만 술꾼 구조대들에게 매우 고맙고 미안하다.



keyword
이전 21화낮술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