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 그리고 장례
할머니는 아빠가 고3이던 해 여름 혼자가 되셨다.
1화. 할머니의 삶과 우리의 관계
우리 할머니는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셨고 우리 아빠가 고3 수험생이었던 해 여름, 할아버지를 일찌감치 떠나보내셨다.
그 떄 우리 할머니 나이는 이제 40이셨다.
먹고살 길이라곤 농사뿐이던 외딴 시골에서 그때부터 할머닌 네 자식을 홀로 키워내셨다.
우리 아빠는 장남이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교육열이 강하셨다.
네 자녀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하루에 두 번 읍내로 버스가 오가는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는 공부 잘하는 큰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셨다. 어릴적부터 공부를 잘했던 중학생 아빠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상경했고 할머니는 막내동생도 공부시키라며 중학생 아이에게 초등학생 남자아이를 딸려 보내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삼촌은 공부와 인연이 없어 몇년 후 다시 시골로 내려갔고 아빠는 서울에 홀로 남았다.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던 시절이라 아빠는 참 어렵게 공부를 하셨다. 학교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을 돈이 없어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매일 집에 돌아와 간장에 밥을 비벼먹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 아플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 그 결과 지금도 건강검진 때마다 "십이지장이 변형되었다" 며 "큰 병원을 가보라"는 말을 들으신다.
그러다 고3이 되던 해, 학력고사를 두 달 남기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수능이 두 달 남은 아이에게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와 외딴 서울 유학생활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아빠는 한 집안의 장남이자 그때부턴 세 동생들의 아빠로 그리고 할머니의 남편으로서의 무게를 지고 대입 시험을 치뤘고, 결국 서울대에 합격하게 되었다. 서울대에 합격을 하니 동네에 플랜카드가 걸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큰 아들을 서울대에 보냈다는 기쁨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내 나이 스물 일곱까지 할머니를 보며 몸소 느낀 사실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그 귀한 아들을 사랑하셨고 그 아들에게서 태어난 오빠와 나를 사랑하셨다.
오빠는 똑똑하고 이쁘다며, 마지막 병원에서 말씀하시기 어려우실때 까지도 말씀을 계속 하셨다.
나는 어릴적부터 아빠를 너무 좋아했다. 아빠랑 잠도 같이 자고 아빠가 출장가면 우는 그런 아빠바보였다.
그래서 할머니의 눈에는 스물일곱 처녀가 된 내가 여전히 아빠와 떨어지면 안되는 애기였다. 아빠가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서 며칠이고 있으니 내가 아빠 없다고 싫어하겠다며 늘 걱정하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아빠 껌딱지이자 혼자서 밥은 어떻게 먹는지 늘 걱정인 어린 손녀였다.
할머니의 화법에는 특별함이 있었다. 바로 '내'라는 표현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우리'엄마, '우리'할머니 등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할머니는 항상 '내'손녀, '내'손주, '내'아들이라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표현을 할머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봐서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좋았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1년에 한 두번 보면 많이 보는 거였지만 '내손녀'라는 말이 늘 기다려져서 보고싶은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
할머니를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할머니와는 늘 친근했다. 아빠는 매일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 씩 할머니와 통화하셨고, 난 저녁 통화를 매일 함께 들었다. 스피커 폰이기 때문이다. 매일 우리가족이 모여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할머니의 말씀을 귀담아들었고 그건 매일 우리를 식탁 앞으로 모이게 만드는 할머니의 선물이었다. 할머니 덕분에 매일 이야기 거리가 생겼고 또 할머니와 떨어져 있어도 할머니의 매일 벌어지는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 있어서 늘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할머니는 말씀이 적다.
아빠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두 분 대화 사이의 침묵 시간이 '통화를 끊었나..?' 할 정도이다. 그럴때마다 엄마와 나는 답답함을 이루 참지 못했다. 그러다 아빠가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면 또다시 말씀을 시작하신다. 아들과 통화는 계속 하시고 싶다는 의미셨겠지. 그 마음이 수화기 너머로까지 느껴질때마다 늘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아들이 얼마나 보고싶으셨을까! 하루라도 전화가 안오는 날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거셨다. 물론 무슨 일은 없다. 바쁜 회사 일 때문에 거르는 날이 있었을 뿐이다.
할머니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정말 정이 많으셨다.
정정하자면 무뚝뚝하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그저 표현을 덜하시는 것 뿐이다. 할머니를 떠올린다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이자 내가 할머니를 삶의 스승으로 잊을 수 었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할머니는 절대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정말 손이 크시고 정이 많으셔서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많이 베푸셨다. 그걸 할머니가 다니시는 종교인 원불교 교무님들도 모두 아시고 동네 분들, 친척 그것도 멀디 먼 친척까지 안다. 김장때가 되면 누구에겐 서울김치를 담궈주고, 누구 누구 온 사람들을 생각해서 마치 가게를 운영하는 집 만큼의 재료거리를 사셨다. (내가 김장을 안해봐서 어느정도인지는 까먹었다^^) 꼭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으시고 콩알만큼 받으시면 수박만큼 나눠주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과시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에겐 정말 별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를 27년간 지켜봐왔을 때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참으시는 게 아닌 정말 진심에 우러나온 자연스런 마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런 우리 할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우리 할머니만큼 대단하신 분을 뵌 적이 없다. 아마도 할머니가 안계신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도 우리 할머니를 늘 생각하며 반성하고 삶을 걸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할머니에게는 습관이 있으셨다. 상대를 빤히 쳐다보시는 것이다.
눈 두덩이가 두툼하신데 속쌍커풀이 거의 안보여서 무쌍처럼 보이는 눈 이시다. 한마디로 꽤나 장군감으로 보이는 매서운 눈매이신데 그런 눈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신다. 아주 긴 시간동안. 그게 늘 신기하면서도 또 기억에 남을 할머니의 특징이다. 빤히 쳐다보시는건 우리가 예뻐서일 것이다. 너무 소중하고 오랜만에 보는 아가들이 언제 다 컸다 예뻐서. 나는 그 시간속에서 할머니의 마음을 늘 감사히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는 돌어가시기 직전까지도 빤히 바라보셔서 우리를 웃게 만드셨다. 눈도 깜빡이지 않으시고 밥도 드실 힘도 없으시면서 말씀조차 하기 힘드신 상황에서 우리 얼굴은 빤히 바라보셨다. 그 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주체할 수 없다. 돌아가시기 전날도 이미 초첨을 잃은 상황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들리시는 걸까. 목소리를 내면 마지막 힘을 내셔서 고개를 세차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리셨다. 그게 인간이 갖는 마지막 힘 아닐까. 그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내 할머니는 입맛도 매우 세련되셨다.
우리는 시골에 갈때마다 할머니를 모시고 설빙에 가서 인절미 빙수도 즐겨먹고, 투썸플레이스에 가서 음료와 케이크도 함께 먹었다. 할머니의 입에서 '이런걸 왜 먹냐, 이게 무슨 맛이냐, 이런 곳을 왜 오냐' 등 그 어떠한 불평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역시 할머니를 매우 대단한 사람이라 존경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할머니는 우리가 모시고 가는대로 묵묵히 잘 있어주셨고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하는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배려가 우리가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즐길 수 있도록 했었다. 우리 할머니는 브리또도 좋아하신다. 서울에 우리집에서 머무실때면 우리가 서울 음식을 함께 먹고 했는데 한 번은 브리또도 드렸다. 맛있다며 신기하다며 잘 드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우리 할머니는 서울 사는 젊은 손자 손녀들과도 잘 맞춰주시는 현대식 할머니셨다. 배려심이 정말 많고 정이 깊으신 스승이 되는 분이셨다.
그리고 10월 6일 오후 4시를 넘기고,
우리는 할머니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드실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사랑하는 내 할머니는 10월 7일 새벽 1시 경 소천하셨다.
다음 화 2부. 10월 6일 그 날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