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예민이와 덤덤이가 각자의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얘기했다. 오늘은 이 둘이 서로의 입장차이를 좁히고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덤덤이가 해야 할 일, 또 하나는 예민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살면서 대부분을 덤덤이로 지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 날카롭게 반응하거나 잘 삐치는 성향의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예전부터 남자사람친구들과 노는 걸 선호했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지인들을 봐도 다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사람들뿐이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내가 다양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닌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곁에 두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전) 남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많이 서툴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주로 덤덤이, 남편은 예민이었다. 내가 하는 행동에 남편은 자주 화를 냈고 이게 왜 화나는 행동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반복되니 나도 억울했고, 왜 이런 걸로 화를 내냐며 남편의 예민함을 탓했다.
이혼을 하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서로를 탓하며 둘 다 끝없는 싸움에 지쳐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있던 일련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 한 명이 져줘야 한다면 ‘그건 덤덤이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얼마 전 나보다 더 강력한 덤덤이와 친밀한 사이가 되면서 그 관계에서 예민이가 되는 경험을 했다.
내 기준에는 너무 무례한 행동이라 기분이 나쁘다 얘기를 했는데, "이게 도대체 왜?"라는 반응을 보이니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가?'생각이 들었다. 내 서운한 감정은 부정당했고 그 사이에 자기 의심이란 물음표가 들어왔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기분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할 수 있지 않냐고 했더니,
"말뿐인 사과인데 무슨 의미가 있어? 왜 이런 거에 기분 나빠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상대방이 기분 나쁘다고 내가 반드시 사과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했다.
나는 본래 덤덤이었기 때문에 저 사고방식과 억울함을 너무 잘 안다. 그러는 한편 내가 이해해하지 못했던 예민이의 감정들이, (전) 남편의 감정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남편 속도 말이 아니었겠다.
이미 한 번 상처를 받았는데 나와 얘기할수록 감정은 더 상하고 예민한 자기 잘못이 돼버리면서 자책까지 더해지는 삼중 대미지가 계속되니 얼마나 아팠을까? 남편이 늘 '수용받은 적이 없다'라고 얘기하는 게 무슨 소린지 당시엔 당최 몰랐는데 내 억울함이 커지면서부터 나는 남편의 서운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거다.
남편의 분노가 쌓였던 이유는 감정이 상했을 때 바로바로 얘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이건 타고난 성향이거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왜 말을 안 하고 쌓아놓냐며 뭐라 했었는데, 이제 보니 남편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 거 같다. 기분 상했다고 말해봤자 자기만 또 화 많은 사람이 돼버리니 '말해봤자야'라는 마음이 서서히 굳어져 점점 더 입을 닫은 거겠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였다. 왜 별거 아닌 걸로 화가 나느냐고 나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기분이 상한 것을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다면 기분이 상하지만 상했다고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하게 되는 거였다.
예민이와 덤덤이의 감정을 둘 다 겪고 나니 내가 생각하는 정답이 생겼다.
'의도를 했건 안 했건 기분이 상한 사람의 마음을 먼저 다독여 주는 게 맞겠구나'라고.
왜냐면 양쪽 입장이 되어보니 예민이 쪽이 훨씬 아프다. 마음이 몇 배는 더 힘들다.
원래 사람은 마음이 다치면 평소 하지 않던 방식으로 툴툴거리기도, 괜한 자존심을 부리기도 한다. 삐뚤어진다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감정을 누르고 상대에게 내 기분을 차근차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명하려다 보면 예쁘게 말하는 건 고사하고 맘에 없는 소리가 나가면서 괜히 싸움이 커지고 오해만 깊어질 수 있다.
그때 기분이 상하지 않은 (혹은 덜 상한) 덤덤이가 먼저 손 내밀어 주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예민이는 어떤 것이 속상했는지 비교적 차분하게 얘기하며 기분을 풀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예민이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2가지가 있다.
1. 덤덤이를 비난해선 안된다. (내가 서운한 건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것뿐)
2. 먼저 사과하고 서운한 마음을 풀어주는 덤덤이의 행동에 고마워하고 그 고마움을 꼭 표현해야 한다.
잘 안다. 예민이 입장에선 덤덤이가 너무 잘못했다는 걸. 그래서 자칫 덤덤이를 비난하기 쉽다는 것도.
[8화 비난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에서 얘기했듯 '비난은 비난을 부를 뿐 아무것도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내가 우리 결혼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통감한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럼에 불구하고 앞서 말한 덤덤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도 모르게 그 친구를 비난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 친구의 어떤 말에 나는 무례함을 느꼈고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 거의 매일 연락하던 사이였지만 며칠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연락을 하게 되면서 그때 얘기가 나왔는데, "그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연락하기 싫었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지금 생각해도 재수 없고 별로야"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언행을 비난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면 절대 좋은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기분이 상한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쉽고 나 또한 저 순간에는 예민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말실수를 했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던 거 같다.
하지만 그 친구의 말이 재수 없고 별로 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이다. 친구는 그 말이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했을 거고, 만약 내가 비난으로 시작하지 않고 그때 들었던 생각과 서운했던 감정에 대해서만 전했으면 크게 반발심이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네가 잘못했어'라는 뉘앙스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 "맞아 내 잘못이야"라는 말이 쉽게 나올까? 영문모를 비난을 받았으니 적개심이 먼저 들면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나 이것 때문에 서운했어"라는 말에는 "미안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만,
"너 진짜 이렇게 말하는 거 문제야"라는 말에는 "미안해"라는 말이 나오기 힘들기 마련이다.
비난은 비난을 부를 뿐 좋은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그래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너무 중요하다. (그렇다고 내 잘못도 아니다. 그냥 생각이 다른 거다). 그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절대로 그걸 티 내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티 내는 순간 나의 예민함은 배려해 줘야 하는 섬세함이 아닌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드는 까탈스러움이 돼버린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내가 덤덤이로서 먼저 남편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힘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편은 자기를 화나게 한 것에 대해 늘 나를 비난했다. 예민이가 돼보지 않아서 몰랐으나,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예민이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덤덤이를 비난하기 쉬운 거였는데 나는 남편의 감정을 보듬어 주기보단 왜 나를 비난하냐며 다그쳤다.
내가 진작에 예민이가 돼 보는 경험을 했었다면 남편의 마음을 더 잘 알아주었을 텐데… 내가 잘못을 했건 안 했건 남편의 감정을 알아주고 무조건 수용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참 미안하다. 남편이 당시에 그렇게 얘기할 때는 모르다가 거울 치료를 당해보니 이제야 깨닫는 내가 참 바보 같다. 비난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면서 나도 모르게 비난이 튀어나간 것 또한 참 충격적이다.
머리로 안다고 내가 그대로 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까. 적어도 감정과 습관에 있어서는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따르는 것은 별개의 일인 듯하다.
정리해 보면, 예민이와 덤덤이가 잘 지내기 위해선 각자 맡아야 하는 역할과 의무가 있다.
덤덤이는 기분이 상한 예민이의 마음을 먼저 풀어주려 노력해야 한다. 예민를 비난하는 게 아닌 어떤 감정이 들었건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해 줘야 한다. (공감이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상대가 그런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수용해 줘야 한다.) 그래야 예민이가 기분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내 말을 들어줄 거야'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쌓이는 것 없이 편하게 안 좋은 감정을 풀어낼 수 있다.
예민이는 내 감정이 상한 것을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고 비난하면 절대 안 된다. 결혼은 왕과 왕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모든 의견은 1:1이고, 절대적인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덤덤이 입장에선 억울한 게 맞다. 기분 상한 예민이가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억울한 덤덤이가 예민이의 마음을 먼저 다독여 주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예민이는 먼저 손 내밀어주는 덤덤이에게 고마워하고 그 고마움을 꼭 말로,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과 태도가 잘 지켜져야만 덤덤이의 억울함이 배려와 이해심으로 승화될 수 있고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서 어쩔 땐 누가 덤덤이가 되고 누가 예민이가 된다면 그 관계는 좋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입장을 느껴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 명이 서운해하거나 화내는 빈도가 높다면 서로가 느끼는 기분과 감정에 대해 충분히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거 같다. 물론 감정이 다 가라앉고 둘 다 기분이 좋을 때 말이다. 둘의 성향이 많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런 태도로 원만하게 대화로 풀어낼 수 있다면 예민와 덤덤이가 잘 지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p.s.
표현을 예민이, 덤덤이로 했지만 예민이가 나쁘고 덤덤이가 쿨한 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둘의 성격과 생각이 다를 뿐이며 누구든 관계에 따라 예민이도 덤덤이도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