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보자 보자보자~ 일단 빌려보자
일찍 아이를 하원시키고 나서 도서관에 데려갔다. 몇 번 도서관에 데려갔더니 도서관에 읽을 책이 많고 재밌다는 걸 파악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도서관은 책과 담 쌓은 남편과는 갈 일 없던 장소였지만, 아들과 가니 또 색다르다. 다만 내가 원하는 분야를 가지 못하고, 어린이 자료실에서 그것도 아이가 좋아하는 주제를 선정해서 그 분야만 파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도서관의 분위기는 따라올 수가 없다.
"엄마, 우리 책 검색하자."
제법 장엄하게 얘기하는 아이의 키워드는 방귀다. .... 물론 좋아하는 분야인 교통수단, 기차, 열차도 있다.
방귀를 검색하면서 어떤 책이 재밌을까 낄낄대야 하는 어머니의 고충은 모른 채 아이는 심각하게 책을 고민한다. 어떤 책을 읽지, 어떤 책을 찾아보아야 재밌을까.
아이를 도서관에 데려오는 시간은 간혹 6시 이전이지만, 직장인의 퇴근시간인 6시를 넘기는 경우에는 아이는 꼼짝없이 종합자료실에서 '방귀'를 검색해서 나온 책을 봐야 한다. 주로 전문서적이거나 건강 권유 서적이다. '기차' 역시도 전문서적이거나 여행서적이다.
제법 어렵고, 제법 난해할 텐데도 아이는 도서관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당연하다. 아이는 아직 한글이 서툴러서 책을 정독하지 않고 속독해도 되는 시기니까. 그러다 책의 어느 부분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있다면 천천히 발췌독한다.
독서의 방법을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이 나는 아이를 보면서 독자 수준에 따른 맞춤형 독서의 방법을 배운다. 우리가 빌리는 책은 꽤나 두껍고, 꽤나 어렵다. 그럼에도 아이는 어떻게 아는 지 귀신같이 기차가 나오는 페이지를 펴서 읽는다.
사람은 역시 좋아하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나보다.
아이는 기차책이 좋아서, 나는 도서관의 조용함이 좋아서 이 시끌벅적한 어린이를 데리고 조용한 도서관에 간다.
아이는 도서관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얌전한 태도를 취하고, 엄마는 도서관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기차책을 찾기 위해 청구기호를 보고 책을 찾아나선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하나의 수사대가 되어 빠릿빠릿 움직인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권장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책을 너무도 좋아하는 오빠 덕에 나 역시 책을 접하며 자라서 나는 당연히 책에 관련된 산업에 종사할 줄 알았다...만 역시 실제와 환상은 다른 것인가. 한 때는 도서관 사서를 꿈꾼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도서관 이용객으로 충분하다. 도서관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집중하는 모습을 한번에 볼 수 있다. 모의고사 오답노트를 만드는 학생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취미 삼아 책을 쌓아놓고 읽는 사람들 등. 모두 조용하다.
묵독의 조용함.
간혹 너무 시끄럽고 간혹 너무 번쩍거리는 낭독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묵독으로 몰두하고 있는 광경은 왠지 흐뭇하다. 아이도 언젠가는 이 광경의 장엄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도서관에 와서 알게 모르게 묵독을 흡수하는 아이의 성장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기까지 하다.
물론 집에 가서 다시 또 책을 낭독해야주어야겠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는 나는 아이에게 책을 골라주고 읽어주는 다정한 엄마가 아니라, 빌리고 싶은 거 있어? 빌리고 싶은 거 다 빌려! 하고 말할 수 있는 플렉스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