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세 단어

욕망과 선택사이 걸쳐진 행복

by 아는이모

몇 년 전부터 유행한 미니멀리즘.


많은 이들이 비움의 실천을 통한 정돈된 깔끔함을 동경하며, 나만의 공간을 확보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비즈니스북스, 2015)를 쓴 사사키 후미오는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을 미니멀리스트라 칭했다.


최소한의 것만 소비하며 사는 삶은 단정하고 힘이 있다. 비워내는 만큼 확보되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여유는 달콤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정확하게 아는 현명함과 그리고 그러한 물건만 사는 절제력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세상은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굴러간다. 모두가 필요한 물건만 구매하는 절제력을 갖춘다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야 함은 물론, 경제와 산업의 발전 또한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난, 세계 경제를 논할 만큼 큰 사람이 아니다. 단지 무의식 중에 강요된 미니멀리즘 때문에 전에 없던 피로가 생겼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기분 전환 삼아 사는 옷이나, 예쁜 쓰레기를 살 때 드는 소소한 기쁨이 어느 순간 불편해졌다. 아쉽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불편한 만큼 마음속 욕망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습관도 생겼다. 사지 않고 참는 마음에 깃든 아쉬움과 사고 나서 드는 후회와 뿌듯함에 집중하는 법도 배웠다.


사람은 누구나 돈과 시간의 쓰임에서 자신의 욕망을 찾는다.


필요한 물건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욕망을 다스릴 줄 알면 행복할까? 자유로워지는 걸까? 욕망을 줄였는데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욕망을 줄이다 인생의 감흥마저 잃는다면?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 단정 짓게 되지는 않을까?

절제의 미덕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어른으로 살다 보니 어떤 현상이든 단순하게 결론짓지 않으려 할 뿐이다. 적게 바랄수록 더 행복하다는 말을 덜컥 믿어버릴 만큼 순진하지 않으니까.


욕망의 종류와 크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욕망을 줄인다고 해서 행복을 보장받을 수도 없고, 욕망을 채운다고 해서 행복과 멀어질 이유도 없다.


그저 '욕망'을 사랑처럼,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욕망이 없다고 간결한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고, 욕망이 크기 때문에 화려한 삶을 복잡하게 사는 것도 아니기에.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만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으면 된다. 삶이 자신의 선택으로 구성되듯, 욕망도 선택의 문제다.

그러니 우리는 끈질긴 지구력으로 행복은 행복대로, 욕망은 욕망대로 추구하면 된다. 욕망을 위해 행복을 포기할 필요도, 행복해지기 위해 욕망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욕망과 행복은 같은 곳을 향해 있으니까.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궈낸 성취감은 여러모로 행복과 닿아있으니까.

누군가가 행복의 반대말을 모호함이라 했다. 결정한 순간 또는 결정된 순간이 확실함을 보장한다. 성취, 안정, 보상 등의 것들이 확실함과 더불어 행복을 엮어온다는 말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이를테면 여행지를 결정하고 숙소를 (이왕이면 최저가로) 예약했을 때, 1차 서류전형에서 매번 탈락하다 덜컥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드는 감정은 행복과 비슷하다.


그러니 불행하다고 느껴질 땐, 무엇이든 결정을 해보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욕망과 행복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을 테니까.


이도 저도 아닌 직장에 자산도, 경험도, 든든한 배경도 없으면서 시작부터 성공을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나였다.


마음먹고 시작한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못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보잘것없이 여겼다. 배경과 능력만을 찬양하는 일그러진 사회가 가혹했다. 시험과 노동에 종속된 청춘으로 몰아세워놓고는 '젊으니까 시도해 볼 수 있잖아,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아.'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도태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줄 세운 사회에서 나 말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할 겨를이 있기는 한 걸까. 앞서 가지 않아도 뒤떨어지지 않으려 이것저것 하다 보니 결국 다 해야 하는, 미션만 남은 인생에서 과연 무얼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하지만 분명한 건, 잠에서 깨고 다시 잠이 드는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란 것이다. 10분 더 누워있을지, 일어날지 결정하는 작은 선택이 하루의 기분을 결정한다. 원서를 낼지 말지, 시험을 칠지 말지,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 집을 살지 말지, 헤어질지 더 만나볼지 등 인생의 행로를 쥐락펴락하는 선택과 결심 뒤에는 욕망이 있다.


늘 최선을 택하지만, 매번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선택 앞에 우리는 자주 주저하고 작아지니까. 사람들은 왜 과거의 나를 미련 없이 놓아주지 못하는 걸까? 왜 굳이 후회와 자책이란 쓰디쓴 애피타이저를 먹으려 들까? 이건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닐까?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어쩌면 이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성인 (聖人)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현재의 선택을 통해 미래를 대비한다. 그나마 괜찮은 오늘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선택을 앞두고 드는 막막함은 어쩔 수없다.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두려움을 내치기 위해서라도 우린 선택을 해야 한다. 그저 그런 선택일지라도 어떻게 서든 매듭을 지어야, 후회든 자책이든 성장이든 발전이든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수많은 가정과 상상에 후회하고 괴로워할지라도, 머물러 있기보다 ‘해 봤노라’라는 매듭으로 마무리하는 편이 낫다.


무수한 선택의 갈림길에 무얼 놓고 왔든, 내가 한 선택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과거의 선택이 모였기에 현재의 내가 있다. 만족스러운 삶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선택지 속 나와 다음의 선택에서 마주할 나와의 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삶은 이 세 단어로 결정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욕망-선택-행복’


어설프지만 연습해보려 한다. 비록 되지 못한 수많은 ‘나’에게 매번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잊지 않고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욕망 앞에 솔직해질 것이다. (예를 들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인세로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라는 식의)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세계와 가까워지는 선택을 하며 한치의 거리낌 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미니멀로 시작해 너무 멀리 와버린 이야기를 읽은 당신도, 언제 어디서 손을 뻗든 행복과 닿아있길 바란다. 자신의 욕망과 선택에 집중하며, 한치의 거리낌 없이 행복해 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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