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운전을 할 때 아내와 대화합니다
명절 또는 휴가 때에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다. 본가가 전라도 최남단(여수)이기 때문에 평균 5시간은 운전해야 한다. 뒷좌석 아이들이 하나씩 늘어 이제 셋이나 되었으니 이젠 질주욕구는 완전히 내려놓고 안전하게 도착하기만을 바란다.
보통 새벽에 이동을 하는데 평균 4시가 출발 시간이 된다. 그러니 30분 전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고 전날 잠을 일찍 청하지만 깊게 잠들기 쉽지 않다. 결국 피곤한 상태로 일어나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때 아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 고속도로 졸음운전은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에 졸음이 올 때를 대비해 출발 후 커피도 마셔두고 씹을 거리도 넉넉히 준비한다. 하지만 졸음의 강도가 올라가면 이런 것들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졸음 퇴치는 보조석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인데 아내가 그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 결혼 10년 차가 되니 1년에 못해도 4-5번은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아내와 찐 대화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번 추석 명절 연휴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길도 마찬가지었다. 올라오며 아내와 4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차가 고속도로에 접어들기 전 시작되는 대화는 늘 비슷하다. 이번 연휴(명절)은 어땠는지, 각자의 눈으로 바라 본 부모님에 대해서, 먹었던 음식에 대해서, 만났던 친척들에 대해서, 만나지 못했지만 전해들은 친척들의 소식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네비게이션이 보여주는 남은 거리가 점차 줄어들어 서울로 가까워질수록 대화의 주제도 현실과 가까워진다.
이번 아내와 대화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가족문화'에 대한 것이다. 아내의 시각으로 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관계, '시어머니'가 남편(아들)을 대하는 방식 등에 대해 아내가 먼저 대화를 열었고 나는 아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내는 알지 못한 우리집 과거 속 인물들(엄마 아빠)의 맥락을 끄집어 냈다.
<이야기1>
시엄마 : 며칠 동안 밥상 차리고 치우고 지겹지 않냐?
아내 : 그러게요. 금방 아침 먹고 치우고 조금 지나면 점심 차리고 또 저녁...그러니깐요. 그런데 엄마는 이걸 평생 해오셨으니까 오죽하겠어요.
시엄마 : 말도 마라. 예전에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때마다 밥상 차리는 것 말고도 아무 때나 찾아오는 손님들 술상까지 차렸으니까. 얼마전 할아버지 추도 예배 때에는 차린 것이 많지도 않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한명도 없으니 힘들긴 하더라. (아빠 형제는 3남 3여로 아빠위로 고모 세분이 있고 아래로 작은아버지 두 분이 계신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3년전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 후 평생 맏며느리였다. 집안내 복잡한 사정으로 두 명의 동서(나에겐 작은엄마)는 명절 때나 집안 일 대소사 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아내가 결혼 후 조금 채웠을 뿐 환갑을 넘긴 엄마의 맏며느리 역할은 지금도 진행형인셈이다.
<이야기2>
아내 : 엄마는 자기한테 시켜도 되는 일을 안 시키려고 하시더라?
나 : 음...그런 부분이 있지. 오히려 아빠한테 시키고ㅎㅎ 부끄럽지만 나도 관성의 법칙처럼 집에 오면 엄마의 배려를 누리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들어. 그래도 설겆이 여러번 했잖아~ㅎㅎ 근데 자기가 볼 때 못마땅해보일 수 있는데 말하자면 복잡한 맥락이 있어서 그래~.
나는 아내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남매를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엄마 홀로 키우셨다는 이야기, 남편의 부재로 인해 홀로 감내 해야 했던 고부갈등과 이 때문에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히스테리적 감정 표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 공부는 잘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에 열외 해주었던 이야기까지 늘여 놓았다.
뒤 늦게 가족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가지며 살아온 아빠, 아랫 동생들까지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살았던 아빠의 이야기까지, 결론은 엄마는 힘겨운 삶에 자식들에게서 위로를 찾았고 아빠와 엄마는 부부지만 공존하고 공유하는 시간들의 부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채워지지 못한 시간들이 현재의 부자연스러움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가 시엄마와 시아빠를 더 이해하기를 바라며 과거의 맥락을 설명했다. 이도 아들이라는 관찰자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석한 것일 뿐이지만 내 이야기가 아내로 하여금 시월드 문화를 ‘그럴수도 있겠다’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자라 온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화를 이해한다'라고 하는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 온 삶의 연수 만큼 무겁고 복잡한 것이 개인과 공동체가 지닌 문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문화를 내가 가진 문화를 기준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갈등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전자의 방식을 택할 경우 소위 갈등이란 것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보다는 오해가 깊어질 뿐이다. 모든 고부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해'하겠다는 태도를 버릴 때라야 역설적이게도 이해하고 받아드려진다고 할까?
나와 다른 어떤 사람과의 관계 맺음도 이러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쳐 지날 관계라면 적당히 이해하는 척하며 살아도 문제 될 일이 없다. 하지만 자주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볼 관계라면 섣부른 판단을 부르는 '이해'하겠다는 태도 보다는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수용적 태도를 먼저 취하는 편이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데 도움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받아드려지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더욱 한 이불 덥고 살 관계라면 더더욱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게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 환경, 생각을 가진 사람만을 찾아 사랑이나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을 나는 긍정하지 않는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의 글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게 태어났고 다르게 자라왔지만 그 다름에 무언가 끌려 사랑하고 관계를 맺었다. 때문에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알고 다듬어 조화로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이 아름답고 시간이 갈수록 조화를 이루려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그럴수도 있겠다' 로 시작하고 기다려주는 태도가 서로에게 필요하다.
누군인가를 만나고 사랑하다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나와 아내에게도 아내와 시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나와 관계 맺는 많은 이들에게도 '그럴수도 있겠다' 태도는 필요하다. 이런 태도가 준비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성숙의 길로 한발짝 내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