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맞을 이번 겨울에 첫 눈은, 조금 따뜻해졌기를.
내게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 으니가 있다. 어쩔 땐 둘도 없는 천생연분처럼 쿵 하면 짝이 맞는 환상의 콤비다. 아니다, 사실 쿵 하기도 전에 ‘ㅋ’만 나와도 바로 짝이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우리는 남들이 보기엔 좀 유난이다 싶을 만큼 찐득한 자매다. 막내동생까지 함께 뭉치면 우리는 그냥 유난덩어리 삼남매가 된다. 특히 겨울이면 더 그랬다. 셋 중 유일하게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에게 열이 많은 두 동생이 뿜어내는 온기는 그 자체로 따뜻한 위로였다.
특히 으니와 나는 햇수로 6년을 함께 살았다. 그 긴 시간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단연코 겨울이었다. 너무 추워 마스크를 쓴 채 패딩을 입고 잠들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2015년에 우리처럼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모든 게 빠듯했다. 먹을 것이 없어 물에 라면스프만 풀어 밥을 말아 먹은 날도 있었다. 라면스프 국물이 우리에겐 반찬이었다. 지금에서야 “열심히 살아라, 다시 라면스프만 먹고 살고 싶나” 하고 서로 농담처럼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땐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쓰디쓴 소주 한 잔에 그 시절의 시간이 연기처럼 자욱해지면 결국 또 한바탕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 우리는 인생의 칠흑같은 어둠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이었다.
서로에게 기대다 못해 마음만큼은 샴쌍둥이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힘들수록 더 서로를 옭아매게 됐던 건. 기나긴 원룸살이를 끝내고 각자의 독립을 결정했을 때, 아니 사실 내가 혼자 정해버렸을 때 으니는 길 잃은 미아처럼 정처 없이 헤맸다. 매일 밤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보냈고, 언니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살충제보다 더 독하게 우리는 서로를 끊어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그 말은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조금씩 서먹해졌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다. 그 상처들이 모여 쓰라리고 아파졌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외면했다. 그때의 나는 타지생활이 버겁다는 이유로 그 아이의 투정이 밉기만 했고, 그때의 너는 떨어져 지내는 모든 일이 내 탓이라 여기며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난 손톱만 한 상처를 돌보느라 상대의 상처 따윈 안중에도 없던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에 받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어떤 말로 시작하든 끝은 싸움일 거란 생각에 한참을 바라만 보다 결국 딸깍. 으니는 울고 있었다.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울부짖는 그 아이의 울음에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전화를 넘겨받은 건 으니의 친구였다. 함께 모임을 마치고 골목길을 걷다 외간남자에게 멱살을 잡혔고, 위협을 받았고,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주저리주저리 이어진 말들 속에서 지금도 내게 또렷이 남아 있는 건 그 빌어먹을 팩트뿐이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나는 곧장 으니에게로 향했다. 밤길을 달리며 울다가, 죽여버리고 싶다며 화를 냈다가, 다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나 때문이라고, 내가 혼자 두고 와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동네 파출소에서 나를 기다리던 으니는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나는 입술이 터지도록 깨물며 울음을 삼켰다. 서로를 바라본 그 순간, 우리는 그동안의 그리움과 원망을 모두 흩어 보내버렸다.
그 겨울, 수만 가지 감정을 품은 우리를 스쳐 지나던 추위는 더없이 차갑고 소름끼쳤다. 우리는 또 그렇게 지옥 같은 일을 함께 견뎌냈다. 어딘가에 첫눈이 왔다는 소식에 온 세상이 떠들썩해지고, 카톡 화면에 하얀 눈이 흩날리는 날이 오면 나는 자꾸만 그때의 우리가 떠오른다. 모두가 설렘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눈이 내리는 날, 웃음 한 점 없던 너무도 아프고 슬펐던 그 겨울의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