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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와 출산의 콜라보

둘째 만삭에 첫째 돌잔치 한사람이 어딨어 ?! - 바로 여기.

by 온오프

나는 임신 기간 동안 조기수축으로 인해

두번의 입원을 겪어야 했다.

첫 번째 입원은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실감조차 나지 않았을 때라 그저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두 번째 입원은 달랐다.

첫째 아이의 돌잔치를 불과 2주 앞두고

임신 33주차에 들이닥친 일이었으니 말이다.


고위험 산모실에서의 하루는 늘 같았다.

눈을 뜨면 간단한 검사, 약을 삼키고,

밥이라고 하기엔 밍숭한 식사를

대충 넘긴 뒤 다시 침대에 눕는 일상.

시간은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흘러갔고

챗바퀴 돌 듯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그럴수록 내가 입원한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나는 입원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심지어 낚시가 취미였던 우리 부부는

“풀치 잡으러 갈래? 지금 완전 느나라는데” 하며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평범한 날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싸르르한 복통이 몰려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곧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이 느낌… 설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7~8분 간격으로 찾아오는 규칙적인 진통.

경산모였던 나는 이 간격이

언제 더 짧아질지 몰라 더욱 다급해졌다.

급히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손끝은 차갑게 얼어붙고 심장은 요동쳤다.


교수님은 잠시 진료 차트를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34주까지만 약쓰면서 버텨봅시다.”

그 말은 곧, 또 한 번의 눈물의 입원을 뜻했다.


병문안조차 허락되지 않는 고위험 산모실은

말 그대로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었다.

낯선 기계음과 희미한 소독약 냄새 속에

홀로 누워 있자니 외롭고 쓸쓸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나는 무너질 수 없었다.

돌잔치를 가고야 말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가

내게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병실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성장 동영상을 만들고,

포토테이블에 올릴 사진들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순간만큼은 병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아이의 웃음이 나를 감싸주는 듯했다.


그리고 결국,

퇴원 후 돌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만삭의 배를 안고 서 있던 나는

그날 비로소 ‘돌끝맘’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얻었다.

한 손에는 돌잡이를 준비한 첫째가

뱃속에는 여전히 자라나는 둘째가 있었다.

내 몸은 무겁고 지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벅찼다.


사계절을 함께 견디고 지나온 시간,

내 품 안에서 아이가 자라

1년을 마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 눈물은 힘겨움의 눈물이자

끝내 버텨낸 나 자신에게 건네는 조용한 박수였다.



돌잔치를 치른 엄마들이 하나같이 말한다.

“차라리 결혼식을 한 번 더 하는 게 낫지, 돌잔치는 두 번 못 하겠다.”

처음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식도 임신 중에 치러서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나만 챙기면 되는 자리였다.

그래서 막연히 ‘돌잔치는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나는 이미 만삭의 임산부였고

12개월이 된 첫째 아이의 돌잔치를 직접 준비해야 했다.

뷔페에서 음식과 장소를 마련해주니 수월할 거라 여겼지만

막상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장 동영상을 만들고, 답례품을 챙기고,

포토테이블에 올릴 사진들을 골라 출력하는 일도

모두 부모의 몫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돌잔치 의상은 엄마와 아이 모두를 준비해야 했고

행사장에서 아이가 먹을 분유, 간식, 기저귀, 담요 같은 필수품도

빠짐없이 챙겨야 했다.


준비물 가방은 산처럼 쌓였고

짐을 나르다 보면 나 스스로가 아르바이트생인지

아이 엄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준비를 마쳤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진짜 전쟁은 당일에 시작되었다.


아이와 씨름하다 겨우 행사장에 도착해 서둘러 메이크업을 받고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

아이의 컨디션에 맞춰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사이에는 기저귀 갈기, 분유 먹이기, 울음 달래기 같은

작은 미션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행사장 곳곳을 뛰어다니며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위기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결혼식은 적어도 나 혼자 주인공이었다.

주변의 어른들과 대화도 통했고,

예식의 흐름은 어느 정도 정해진 대본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돌잔치는 달랐다.

주인공은 온전히 아이였고

모든 일정과 분위기는 아이의 울음과 웃음에 따라 요동쳤다.


그날 하루, 나는 왕을 모시는 시녀가 된 듯

땀을 훔치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사진 속에서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지만,

내 속은 이미 전쟁터였다.



돌잔치가 끝나고 나서도 끝은 아니었다.

‘돌끝맘’이라는 이름표 뒤에는

곧바로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출산이었다.


다행히 두번째 입원 후로는

큰 이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37주에 유도분만을 예약했고,

정해진 날짜를 기다리며 차근차근 아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집안을 정리하고 짐가방을 챙기며

머릿속으로는 출산 이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마음은 자꾸만 복잡해졌다.

출산이 다가올수록 첫째와의 잠시 이별이

왠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더 자주 안아주고,

더 자주 “사랑해”라고 속삭였다.

짧은 순간에도 아들의 향기를

오래 맡아두려는 듯

볼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다.

그 애틋함은 다가오는 출산의 기쁨과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도분만을 하루 앞둔 저녁.

갑작스럽게 열이 올랐다.

마치 악몽처럼 어린이집 0세반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 역시 체온계에 찍힌 숫자가 37.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 돼… 출산 전날에 코로나라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태동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발걸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첫째 아이를 급히 데리고 소아과로 달려가 검사를 받게 하고,

나는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흘렀고,

작은 알림음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순간, 불현듯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둘째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첫째의 건강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코로나만 아니길.”

그 절박한 바람 속에서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엄마가 맞는 걸까?

이와중에 아픈 아이보다

코로나결과만 기다리는 나는

나쁜 엄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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