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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onsoo Aug 15. 2020

[너를 통해 나를] 이어지는 기억

2020년 5월 / 모퉁이를 돌아 길을 건너며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순간이 있다. 그때엔 깊이 남을 줄 모르고 지나지만, 감각은 순간을 선택해 짧은 필름으로 녹화해 나름의 분류로 저장한다. 그리고 어떤 날 비슷한 질감의 상황을 만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어진 기억이 재생되어 지금과 함께 길을 걷는다.      


“엄마, 꽃들이 마구 떨어져 있어요.”          


킥보드를 탄 아이가 앞서가며 말한다. 아이의 말에 시선을 내려 이팝나무의 떨어진 꽃잎과 주변에 돋아난 들꽃을 살펴보았다. 나는 잠깐 혼자였던 때의 나를 떠올렸다. 봄이 오면 뽀얗고 희미한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피어있는 꽃들을 천천히 오래 들여다보던 날들. 그러다 멀어진 아이가 모퉁이를 돌아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 놀라 달려가며 기억의 녹화버튼이 눌려졌다. 조용한 동네 길이었지만 혹시나 사고가 날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괜한 조바심이지 하면서도 짧은 순간 속력을 다해 뛰어 돌면서 다시  아이가 평온한 일상 안으로 보여졌을 때의 안도함.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졸아든 숨을 돌렸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멈춰서 내 손을 잡더니 “엄마가 제일 좋아”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도 네가 제일 좋아.” 녹화가 종료되었다.


기억이 저장되며 그곳에 있던 다른 기억이 재생되었다. 스물아홉, 버스 안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기 위해 누른 하차벨 소리와 함께 갑자기 어떤 생각이 뛰어 들어왔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이 생각은 빠른 속력으로 부딪쳐와 가슴이 쿵하고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속이 어지러웠다. 엄마가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불안이 불쑥 낯선 객처럼 찾아온 것이다. 심리 상담 치료를 7개월 정도 지속했을 때의 일이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나아지려면 부모와의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어린 날 부재했던 엄마를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나에게 관계 맺기 위한 작은 과제를 종종 내주셨다. 사소한 고마움을 분명히 전해질 수 있도록 표현해보는 것,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에 대해 물어보는 것, 둘이서 산책을 해보는 것 같은 일들을 어색했지만 하나 둘 수행해나갔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좁은 고시원 방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자주 길 가의 시멘트 턱에 앉아 생각했다. ‘혼자여도 괜찮다. 내가 태어났을 때엔 맨 몸으로 태어났을 텐데, 지금 이렇게 옷도 입고 있고, 학교도 다니고 있고, 들어갈 방이 있고, 먹을 밥도 있다. 참 감사하지.’ 또 생각했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모르지.’ 누구도 이해하지 않을 그 해가 지는 시간이 신기루 같이 느껴졌다. 거칠고 단단한 땅을 손으로 만지며 가만히 고요함을 다독였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사람이 필요함을 느낀다는 것은 고시원 방에 혼자 들어갔을 때 다음 날 아침까지 외로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비누를 챙겨나가 세수를 하고 교복을 빨아 널면서, 되도록 사람이 없는 시간 3층 식당에 들어가 커다란 밥솥에서 밥을 꺼내 먹으면서 이야기할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불을 끄고 어둠에 누웠을 때 적막과 만나야 한다는 뜻이고 어쩌면 원망하는 마음이 나의 속을 까맣게 태워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잡아 주기를 바라는 손을 내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그냥 침대와 책상이 겹쳐진 네모난 틈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렸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건널목을 향해 걷는 30미터 남짓 짧은 시간 동안 엮인 기억이 빠른 열차처럼 지나갔다. 신호등 앞에서 생각을 멈춘다.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 그래서 나는 길에 차가 다니고 신호등에 빨간 불과 파란 불이 켜지는 주변을 살피는 일에 더 예민해졌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어 본다. 이제는 내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내가 완전히 혼자라고 생각했던 때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와 연결된 사람이 있는 세계로 건너왔다. 


누군가를 잃을까 두려운 기분이 찾아온다는 것은 나에게 단순히 불안한 감정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커다란 마음에 마주하는 정직한 힘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꿈'의 다음 이야기는 9월 5일에 공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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