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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Apr 18. 2024

지각

매일 지각하는 아이의 사연

혼자 이었기에 눈에 띄었다. 9시 20분 후문 앞 사거리 교통정리를 마감하려 하는데 그가 나타났다. 개학 첫날이었고 11시에 입학식이 있는 1학년을 제외하고 2학년 이상은 9시 등교였다. 친구들은 이미 수업 중인 시각에 그는 홀로 등교했다. 몸이 크지 않아 신입생 같아 보였다. 낡은 파란 가방을 메고 커다란 종이백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종이가방에는 준비물인 듯 제법 큰 부피의 무언가를 담았다. 준비물을 챙긴 것으로 보아 신입생은 아니었다. 등교 시각을 놓친 학생들과 달리 서둘지도 않았다. 보행 녹색등으로 바뀌기 전 노란 신호등일 때 나는 안전지시봉을 깜박이며 도로 중간에 서서 차량진입을 막는다. 건너편에서 동료가 호루라기를 불면 이를 신호로 아이들은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한다. 9시가 다가오면 뛰지 말라고 소리쳐도 애들은 우르르 뛰어 교차로를 건넜다. 어떤 아이는 “야 선생님이 도로에서 뛰지 말라고 했어!” 라고 소리지르며 친구를 쫓아 뛰어갔다. 조금만 늦으면 지각이라는 두려움이었는지 아니면 아이들의 습관인지 모르지만 많은 아이들이 뛰어서 사거리를 건넜고 뛰어서 후문으로 향했다. 나이 든 노인이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만이 서서히 걸었다.

그는 뛰지 않았고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건널목을 건너더니 100미터도 안되는 교문까지 갈지자로 걸었다. 중간에 멈춰 발 밑을 한참 보고 식당 앞에 진열해 놓은 화분을 곁눈질하다 학교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내가 답답했다. 아마 내 자식이었으면 달려가서 지각이니 빨리 가라고 큰소리를 치거나 등짝을 밀었을 것이다. 

첫날의 기억이 또렷해서 다음날도 그 애가 눈에 들어왔다. 급우들은 이미 책을 펼치고 수업을 준비하고 있을 9시 몇 분 전이었다. 그 시각에 거리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생들이 어쩌다 등교했다. 여전히 지각이지만 어제 보다는 일찍 왔구나 하고 안도했다. 좀더 자세히 보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방한복을 걸치고 있었다. 바지는 낡은 체육복이었다. 가방은 어깨에 멨는데 한쪽 끈이 약간 쳐져 있었고 운동화는 낡고 더러웠다. 얼굴은 물만 묻혀 씻은 듯했다. 교차로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으면 어떤 아이들은 먼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고, 어떤 아이들은 내가 “안녕!” 하고 인사하면 말로 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차단봉에 손을 대고 주저 앉았다.

녹색 신호등이 켜지고 호루라기 소리가 크게 울린 후 그는 여전히 한가롭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안전지시봉의 깜빡이를 켜고 학교 방향을 가리키며 안내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각이니 서두르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그 아이에게 매일 늦을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9시 10분전까지 등교해야 한다. 늦어도 5분 전까지는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후문 건너편에 아파트와 빌라 등 주택가가 밀집해 있다. 후문 앞 교차로는 8시 40분부터 50분까지 엄청 붐빈다. 교차로는 길을 건너는 곳이기도 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이다. 학교에 홀로 가는 아이보다 보호자와 같이 등교하는 아이가 많다. 대부분은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여성이 어린이를 동반하지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같이 오는 경우도 꽤 있다. 8시 20분 전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남매도 아버지와 같이 등교한다. 많은 학부모는 교차로에서 아이가 길을 건너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돌아서지만 일부는 교문 앞까지 아이들을 바래준다. 형제나 자매가 같이 등교하는 경우도 있고 차로 직접 교문 앞까지 태워 주는 학부모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교차로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만나서 같이 학교로 향한다.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편의 친구 이름을 서로 부르며 호들갑 떠는 여자 아이들이 많다. 8시 45분이면 출근하는 차량과 등교하는 아이들로 도로가 번잡하고 정신이 없다. 노란 신호등인데도 길을 통과하려는 차량을 막아야 하고, 녹색등으로 바뀌지 않았는데 급한 마음에 도로로 뛰어드는 아이를 제지해야 한다. 아이들이 길을 건너면 몇몇 학부모들은 사거리에 서서 어제 일을 뒷담화 하기도 하고, 커피 한잔하자고 하며 방향을 튼다.

9시가 지나면 인도는 한산해지고 등교하는 아이도 거의 없다. 그때 한가롭게 터덜터덜하며 나타나는 그를 기다렸다. 보이지 않으면 내가 교통정리에 신경을 쓰는 사이 지나갔다고 여겼다. 3월 중순 그날도 9시가 되어서 그가 교차로에 나타났다. 겨울 외투를 벗고 가벼운 겉옷을 걸쳤다. 운동복 바지는 여전히 색이 바랜 파란 츄리닝이다. 3월 바람은 아직 차가운데 낡은 운동화 대신 로마 검투사가 신을 법한 구멍이 숭숭 뚫린 회색 스포츠 샌들을 신었다. 양말은 짝짝이다. 한쪽은 주황색 한쪽은 얼룩 무늬이다. 양말 디자인이 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샌들과 양말의 색상이 조화롭지는 않았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지는 않았다. 

거의 매일 지각하는 그가 궁금해서 동료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교통 봉사를 오래했다는 그녀는 아이들에 대해 많이 알았다.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 들었다. “아! 그 애, 3학년인데 내가 있는 동안 항상 혼자 등교했고, 학부모 중 어느 한 분도 보지 못했어요.” 라고 했다. 그 애는 등교시 친구들과 같이 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하긴 뭐 그렇게 일관되게 같이 지각할 친구는 없을 것이다. 준비물을 챙겨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집에서 누군가 돌봐 주는 사람이 있어 보이는데 왜 지각하지? 우등상 못지않게 개근상을 중요시 하던 우리 세대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학교를 돌아보다가 운동장에서 그를 보았다. 따뜻한 봄볕을 맞으며 체육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지시로 아이들이 줄을 맞춰 서고 있었는데 회색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잠시 멈춰 아이들을 지켜 보았다. 그 아이는 친구들과 웃고 장난치며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지각하는게 아니라 친구들과 학부모가 많은 시각을 피하는게 아닐까? 정부가 2016년 선포한 아동권리헌장의 4조는 다음과 같다.  “아동은 개인적인 생활이 부당하게 공개되지 않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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