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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THE RECORD Feb 26. 2020

유쓰망고, 공립형 대안학교를 찾다.

학생 수만큼 다양한 배움이 존재하는 학교


탄생, 성년, 결혼과 죽음, 사람이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식을 통과의례라 부른다. 네 가지 항목에 하나를 더하자면 ‘교육’이 아닐까 싶다.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학교 교육을 이수하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으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는 구조가 됐다.


동일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게 사회 구성원이 되는 데에 정말 중요할까? 이와 같은 질문에 정답은 아니지만, 해법을 찾아 나선 학교들이 있다. 바로 공립형 대안학교다. 공립형 대안학교는 공교육 제도 내에서 학습자 중심의 자율적인 교육 과정을 운영하도록 고안된 대안교육 학교를 말한다.


일반계고에서 공립형 대안학교로 전환이 가능하다? 

한국의 대안교육은 1997년 간디학교 개교를 시작으로 공교육 내에서 해소되지 못한 교육적 요소를 모색하면서 출발했다. 2020년 2월 현재 전국에 비인가 대안학교가 130여 개, 교육부 인가를 받은 대안학교가 55개교에 달한다. 적지 않은 숫자이다. 


하지만 사립 대안학교들은 ‘공교육의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이유로 외면받거나 사회에서는 ‘부적응 학생이나 가는 곳’ 또는 ‘학비가 비싼 귀족학교’라는 인식을 이겨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물론,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대안 학교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세상을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는 대안적 교육을 찾아 변신을 꾀하는 학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최근 몇 년 사이 공교육 내 대안학교 설립 또는 전환의 움직임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지난해 강원도 홍천에 공립형 초등 대안학교 ‘노천 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을 보면, 대안교육이 중·고등학교를 넘어 초등학교까지로 넓어졌다.


대부분의 공립형 대안학교는 개교 때부터 대안학교의 형태를 띠는데, 고산고등학교(교장 장경덕)는 좀 특별하다. 1981년 개교해 지난 40여 년간 일반계고로 운영하다가 2018년에 공립형 대안학교로 전환한 것이다. 

고산고등학교 전경 ©김하늬

전북 완주에 위치한 고산고는 전주와 인접해 있다. 전주 시내 인문계고와 실업계고 진학에 실패한 친구들이 오는 학교로 학업 분위기는 물론 생활 지도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완주에서 유수한 선배들을 배출한 학교라는 명성은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고산고 보다 먼저 생긴 공립형 대안학교인 경기대명고(수원), 한울고(전남), 태봉고(창원), 현천고(횡성)는 시도교육청의 주관으로 설립된 경우다. 지역 주민들의 저항과 공립학교들의 따가운 눈총과 싸워야 했던 것과는 반대로 고산고는 마을 주민들과 동문, 졸업생들의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 전환됐다. 대안학교로의 전환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마을공동체의 지원과 응원 덕분에 가능했다.


마을을 지탱하는 교육공동체

고산고는 어떻게 마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고산면에는 삼우초, 고산초, 고산중, 고산고 그리고 전북 푸른학교(특수학교) 5개교가 전부다. 초, 중학교 의무교육을 받은 고산의 아이들이 질 좋은 고등교육을 위해 타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면, 지역은 어떻게 될까? 청소년 시기의 아이들과 젊은 부부들이 지역을 이탈해야 하는 상황이 당연하게 그려진다. 교육을 위해, 경제 활동을 위해 지역을 떠나고 나면 다시 돌아오기란 쉽지 않다. 고산고는 지역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청소년과 청년들의 보금자리, 마을공동체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고산고뿐 아니라 읍면 단위의 많은 학교들이 마을을 지탱하는 경우가 많다.


주민들이 어떻게 전환한 학교인데요!
아이들이 고산에서 잘 자라고
이곳에서 좋은 어른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고산고 학부모회장 김애란


일반계고와 대안교육이 혼재되어 있던 지난 3년. 학교 내부의 갈등과 혼란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학년은 대학입시를 위해 학업에 열중해야 하고, 어느 학년은 대안교육 특성화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지난한 과정을 묵묵히 수행해 줄 교장 선생님도 필요했다. 고산고의 파격은 교장 선출 과정에서도 보여주는데, 내부형 공모 교장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학교장은 교장 자격증을 소지한 교감(또는 전문직)이 발령받아 학교에 배치되지만 내부형 교장공모제는 교장 자격증 미소지자인 평교사도 응시가 가능하다. 

‘교장’이라는 직책 대신 ‘최종 책임자’라고 적혀있는 명패 ©허경진


고산고는 27년간 사회 교과를 가르친 평교사 장경덕 선생님을 교장 역할을 맡겼다. 어떤 교육철학으로 어떤 아이들을 길러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교장, 수업하는 교장, 행정업무 하는 교장, 교사가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교장을 택한 것이다. 그의 공식 직책은 ‘최종 책임자’. 최종 책임은 본인이 질 테니 마음 놓고 시도를 하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1학년은 대안교육의 형태로 가르쳐야 하고 3학년은 입시 준비를 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교사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컸죠. 이런 상황을 고산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논의하고 도움 요청을 많이 했습니다.
- 고산고 최종 책임자, 장경덕 


학생 수만큼 다양한 배움이 존재하는 곳고산고

올해로 대안학교 전환 3년 차를 맞이하는 고산고는 전 학년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입학한 학생들로 구성됐다. 대학 진학만이 목표가 아닌, 다양한 삶을 꿈꾸며 자신에게 걸맞은 수업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교육을 받게 된다. 입학 시, 누구의 의지로 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학생과 학부모 모두를 상담하는 것은 필수 코스다. 


고등학교의 3년간 이수해야 하는 교육시간은 204단위로 일반적으로는 대입 준비를 위한 보통 교과로 편성하고 있다. 그런데 대안교육 특성화고등학교의 경우, 일반 교과 66시간을 최소 단위로, 대안(전문)교과 124단위까지 편성할 수 있다. 고산고는 일반 교과 93단위, 대안(전문)교과 87단위로 편성했다. 교과과정 편성에 학교의 자율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공교육 학교 중 교과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경강을 걷는 1학년 학생들 모습  (사진 출처: 고산고등학교 홈페이지)

고산고는 대안교과 중 1학년은 지역 기행, 2학년은 7박 9일의 해외 이동학습(호치민 투득 고등학교와 1:1 교류), 3학년은 팀 프로젝트를 중점 교과과정으로 편성했다. 그중 1학년 때 실시하는 지역 기행은 만경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알아가는 교육과정으로 1학기 때에는 역사, 지리, 인문 사회 등 지식 중심의 수업을, 2학기 때는 만경강 걷기를 통해 3박 4일 간 마을 기행을 한다. 우리 지역에 어떤 지리적 특성이 있는지, 어떤 역사적 배경을 통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를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한 이해를 하고, 2학년 때는 세상을 보게 된다. 그 중간중간은 관심사를 발견하고 행동으로 옮겨보는 수업들로 채워진다. 

자신을 표현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고2 뮤지컬 수업 발표 모습 (사진 출처: 고산고등학교 홈페이지)

우리는 결과에 주목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간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는 대입의 결과, 혹은 대기업의 취업이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그러나 배움을 성장의 과정으로 본다면, 좋은 대학이나 회사가 한 인간의 성공과 행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공립형 대안학교는 아이들 배움의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학교생활 동안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관심사가 있는지, 무엇에 도전하는지, 실패하는 과정 중에 또 다른 배움은 없었는지 등을 봐주는 학교의 문화 덕분에 학생 수만큼 다양한 배움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여기는 인생의 길목그 어디쯤의 과정이다.

삶의 형태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동안 학교의 모습도 그래 왔다. 우리에게 고등학교의 갈래는 일반계고와 특성화고(예전엔 상고, 공고 등으로 불리던 실업계고) 크게 두 가지 형태뿐이었다. 중학교 때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그 안에서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고, 특목고나 자사고 등 조금 더 많은 갈래가 생겼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은 자연스럽게 일반계고 – 대학입시의 과정을 선택한다. 가장 보편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특성화고는 대학 진학보다는 취업을 염두에 두고 교과 과정이 구성된 학교로, 전문 기술을 배우거나 졸업 후 관련 분야에 바로 취업을 목표로 한다. 뚜렷하게 배우고 싶은 게 있거나 취업을 바라는 학생들이 선택한다.


이런 상황에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평생 밑바탕이 될 배움을 입시/취업을 기준으로 삼는 게 맞는가? 입시와 취업을 결정하기 위해 스스로를 충분히 탐색할 시간이 주어졌는가?


1층 중앙 현관에 붙어있는 고산고 학생 초상화. 다양한 학생들의 모습처럼 학교의 형태도 다양해야 한다. ©김하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공립형 대안학교는 찾고 있다. 당장 정답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해법을 찾기 위한 실험을 학생, 교사, 교장, 마을이 함께하고 있다. 수업의 목표를 학업 성취의 수준이 아닌 ‘역량’에 맞춰 교과과정을 개설하고 다양한 삶이 있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학교의 형태가 필요하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는 결과가 아닌 인생의 길목 어디쯤이다. 누구나 그 과정 안에 있음을 잊지 말자.   



경진커의 탐방 노트 

대안학교와 대안교육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형태는 대안학교이지만 대입과 취업의 결과물에 집중하고 있을 수 있고, 공립학교이지만 다양한 선택지를 통해 배움의 과정에 집중하는 학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대안교육은 어디서든 가능하다. 


최근에는 기존 학교들이 대안교육의 형태로 전환하는 양상도 보인다.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팔렬중·고등학교가 사립학교에서 공립형 대안학교로 전환했으며, 남해 상주중학교도 대안교육 특성화 학교로 전환했다. 지난해에는 공립형 대안 초등학교(노천 초등학교)가 개교했으며, 충남과 충북, 울산에서도 공립형 대안학교 설립 준비가 한창이다. 


우리가 그동안 어떤 과목을 얼마만큼 가르쳐야 하는가에 열중했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어떤 환경일 때 배움이 일어나는가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 때이다. 유·청소년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나가, 또는 어른이 되어 학생들의 잠재력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가를 상상해야 한다. 한 학생에게 어떤 경험치를 줄 것인가, 어떤 선택지를 줄 것인가를 고민하며 학습 설계를 할 때, 다음 세대들의 삶은 풍부해질 것이다.  


©유쓰망고

글. 유쓰망고 전략기획디렉터 허경진

편집. 씨프로그램 러닝펀드 매니저 문숙희


유쓰망고가 만난 교사 커뮤니티 더 살펴보기

https://brunch.co.kr/@ontherecord/211

https://brunch.co.kr/@ontherecord/208

https://brunch.co.kr/@ontherecord/203


러닝랩 펠로우십(Learning Lab Fellowship)이란

씨프로그램은 지난 2년간 러닝랩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배움에 대한 여러 시도를 지켜봐 왔습니다. 동시에 의미 있는 실험이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과 환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만남과 고민 끝에 러닝랩 펠로우십을 시작합니다. 러닝랩 펠로우십은 다음 세대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배움의 환경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팀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원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유쓰망고는 학습자 중심 배움을 실천하는 것을 미션으로 삼는 교사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전국 단위 확장을 목표로 하는 망고T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러닝랩 펠로우십을 통해 전국 곳곳에서 학습자 중심 배움을 실천하는 교사 모임을 발굴하고 각 모임을 연결 지어 학습자 중심 배움의 환경을 확장하는 데에 기반을 닦을 예정입니다그 과정의 첫 기록으로 유쓰망고가 만난 교사 모임 중 ‘디퍼 러닝(Deeper Leanring)’ 6가지 요소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교사 모임을 2019년 11월부터 6개월간 매달 한편씩 시리즈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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