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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에가는길 Jul 22. 2024

인간이 만든 숲

어느 대학원생의 일기


2023년 7월 27일 아침,

실습처에서.



 매주 목요일은 실습을 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는 날이다. 지하철 타는 시간만 1시간 45분. 걷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2시간 반쯤 되려나.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6시에 출발하면 된다. 실습이 시작되었을 땐 거리가 멀고 말고를 생각도 안 했었다. 우리 학교 우리 과에서는 참으로 귀한 실습이었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나는 원래 이렇게 겸손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데 이 실습은 정말로 고마운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일찍 출발하다 보니 한여름이어도 비교적 시원할 때 돌아다니게 되어 그거 하난 좋다.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18년도의 한여름 오전 9시를 떠올리게 된다. 그해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었고 나는 그걸 살갗으로 느꼈었다. 3조 2교대로 일을 하던 때여서 야간 근무를 한 날에는 오전 9시를 좀 넘은 시각에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의 열기는 말로 다 못 한다. 아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열하는 태양이 대지와 내 몸을 구워삶았다. 


 잠깐 딴소리를 했지만 오늘 글을 쓰는 것은 기흥이라는 지역에 대한 감상을 적기 위해서다. 오늘 오는 길에 에버라인을 타고 기흥구를 달리다 창밖의 풍경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었다. 열차 안으로 들이치는 햇빛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잠시간 눈앞에 짙푸른 녹음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마음에 쏙 드는 풍경도 발견하였다. 동화 같은 초록 속에 녹슨 컨테이너가 덩그러니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았다.


 멍하니 보고 있으니 열차는 곧 어정역에 다다랐다. 여기가 어정역이구나. 이대로 내려서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갈 곳이 있었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반드시 여름이어야 하겠고, 너무 뜨겁지 않고 또 너무 밝거나 어둡지도 않게 아침이 딱 좋겠다. 어정역까지만 와도 집으로부터 한참은 멀어지는 것이지만 한 번쯤은 그래도 좋을 것 같은 날이 있을 것이다.


 어정이라는 이름의 어감도 퍽 아름다워서 무슨 뜻인가 찾아보았다. 오래전에 붙여진 이 이름을 두고 그간 여러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붙여지던 당시의 뜻이 무엇이었을지 추론하면서 한자 표기가 여러 차례 바뀌었더라. 맨 처음엔 수여선(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이다)의 역 이름을 따서 ‘漁汀’을 쓰고 있었다가 1995년에 일본식 지명을 정비하기 위해 바꾸기로 했단다.


 그때는 세종대왕이 여주에 행차할 때 들러 물을 마시던 우물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御井’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1월에는 ‘우물 정’ 자를 ‘머무를 정’ 자로 바꾸어 ‘御停‘으로 결정하였다. 성종이 행차할 때 들러 머물던 곳이라는 구체적 기록을 실록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비로소 조상들의 뜻을 간파하고 옳은 답에 도달했을지 역사와 한자에 무지한 나로서는 가늠할 수도 없다. 단지 어정이라는 어감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건 한자와 관계없이 느낄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바에는 한참 일찍 도착하기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늘 실습 전에 시간이 넉넉히 남는다. 그래서 아직 달궈지지 않은 공기 속을 거닐며 커피도 사 마시고 동네 구경도 할 수 있다. 지난주엔 비가 와서 좀 처량하게 걸어 다녔는데 오늘은 햇살과 공기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다. 아, 좋은 날이다. 시작이 좋았으니 뭘 해도 좋은 날일 것이다. 세상의 환대를 받았으니 오늘은 또 어떤 사정으로 인해 귀가가 좀 늦어지더라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어정에 내리고 싶었지만 동백도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기흥구 전체가 아름다운 녹음에 둘러싸인 듯싶다. 반듯하게 빚고 깎은 건물들이 잘 조성된 풀과 나무에 안겨 있다. 인간들은 높고 거대한 건물들을 볼 때 참 크다고 느끼지만 자연은 그것을 간단히 압도한다. 짙은 녹색은 매우 위엄 있는 색깔이다. 그리고 이 짙푸른 초록에는 늘 파란색의 하늘이나 바다가 어우러지게 되어 있다. 신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조화를 선택했을까. 인간은 그것을 제법 잘 흉내 내어 이런 풍경을 만들어냈다. 


 우리 엄마는 집에 온갖 종류의 화초를 30개는 족히 키우고 있는 고수다. 키우기 힘들고 꽃이 아주 가끔만 피고 쉽게 죽어버리고 가정집에선 힘들다던 것들도 무럭무럭 길러냈다. 반면 그 뱃속에서 나온 나는 식물을 기르기는커녕 꽃의 예쁨조차 모르는 인간이어서 엄마가 이 화초 너무 예쁘지 않니, 물을 때면 모르겠다고만 한다. 그런 나도 지금만큼은 왜 사람들이 숲을 지키고 또 만들어 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지 알 것 같다. 


  숨이 트인다. 매주 목요일, 전날 늦은 밤까지 할 일을 부랴부랴 마쳐놓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한 뒤 5시에 깨어 6시에 출발해야 하는 다리는 걷기 싫어 미적대지만 일단 이곳에 도착하면 상쾌한 공기가 폐부의 권태와 피로를 몰아낸다. 오늘도 잠이 부족하고 지겨운 일들만이 나를 기다리지만 왠지 이대로 영원히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풀과 나무가 나누어주는 초록을 받아마시면서.


 이곳으로 실습을 나오기 전까진 용인에 올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어정이라는 곳의 존재도 몰랐다. 에버랜드라면 모를까, 겨우 풍경을 보러 다시 한번 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우연하고 기쁜 만남이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매일같이 새로운 발견을 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내가 존재조차 모르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겠구나. 그렇다면 오늘은 조금 이르게나마 익숙한 결론을 내려 본다. 역시 인생은 한번 해볼 만한 여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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