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생의 일기
2021년 5월, 오후 8시 53분
오랫동안 즐겨했던 모바일 게임이 두 달 뒤에 섭종을 한단다. 섭종, 서비스 종료. 적어도 한국에선 더 이상 플레이 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게임을 같이 하던 친구들이 단체 채팅방에 불이 나도록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굳이 생각 안 하고 있었을 뿐 완전히 예상 못 할 소식은 아니었을 거다. 서비스 종료는 모든 온라인 게임의 숙명이고 그중에서도 모바일 게임은 수명이 한층 짧으니까. 예상보다 조금 이르긴 했다.
이제 두 달간 나는 '접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실 두 달 전에 미리 예고되는 이별은 젠틀한 편에 속한다. 원래 온라인 게임은 쉽게 생기고 쉽게 사라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만들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플레이했었는지와 상관없이 끝날 때는 갑자기 끝나버린다. 그런데 내게는 두 달이 남았으니 이 두 달 동안 제일 재밌는 부분을 반복할 수도 있고 게임 화면을 캡처해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게임을 켜고 그 안의 세상을 좀 둘러보았다. 간만이었다. 최근엔 꽤 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걸 갖고 할 만한 웬만한 건 이미 다 했다. 에너지며 시간이며 돈이며 쓸 만큼 썼고 이 안에서 내가 못 해보고 못 가져본 건 거의 없다. 물론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매주 매달 새로운 콘텐츠와 이벤트가 또 생겨나지만 그것도 결국 다 거기서 거기다. 게임이란 본래 무한한 즐거움의 화수분은 아니다.
그렇게 된 이 시점에서 게임에 접속해 봤자 관성대로 몇 가지 익숙한 활동을 할 뿐 그다지 새롭게 재미있을 것도 없다. 그래도 내 손가락은 작은 화면 속을 열심히 누빈다. 액정을 쓸고 누르는 족족 그간 내가 해온 것들이 화면에 떠오른다. 내가 키워놓은 캐릭터들과 완수한 미션들, 달성한 기록들과 모아놓은 재화들.... 이젠 그 위에 보이지 않는 타이머가 째깍댄다. 두 달 뒤면 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모든 게 가상현실 속의 데이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기 신호를 차단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증발되고 그 자리는 태초의 공허로 돌아간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화면 속의 것들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나도 이런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손에 넣으려고 열을 올리던 이것들 전부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유통사는 앞으로 두 달 동안 서비스 종료 기념(?)으로 유료 재화를 마구 뿌리겠다고 했다. 와, 저걸 저만큼 준다고? 그동안 내가 저거 모은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갑자기 그동안의 모든 노력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깡으로 사려면 비싼 강화 재료들을 하루에 네 번 정해진 시간에 사냥을 통해 무료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휴대폰 알람을 맞춰놓고 자다가도 일어나서 사냥을 했다. 시험기간에도 해외여행을 가서도 빼먹지 않았다.
그날그날 플레이어마다 랜덤한 사냥터가 배정되고 개중 일부만이 높은 등급의 재료를 준다. 나는 매일 좋은 사냥터로 사냥을 나가기 위해 부계정을 20개도 넘게 만들었다. 이 게임을 한창 열심히 하던 시절에는 모든 부계정에 차례로 로그인을 해서 그중 좋은 사냥터가 뜬 계정을 찾는 것이 내 일과 중 하나였다. 이 부계정 군단은 어느 악독한 이벤트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그건 진짜로 악독한 이벤트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 캐릭터에 추천을 눌러서 순위권에 들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20여 개의 부계정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 한 표씩 얻는 걸로는 택도 없었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추천을 구걸하고 좋은 사냥터로 초대하고 어려운 미션을 함께 해주고 심지어는 돈(현실의 돈)까지 줘서 추천을 긁어모아야 간신히 순위권에 들 수 있었다.
그 고생을 해서 순위권에 들면 무엇이 주어지느냐. 캐릭터가 입는 옷을 염색할 수 있는 염색약이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캐릭터에게 입힐 가상의 옷을 염색할 가상의 염색약. 물론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건 한정 보상이었다. 오직 그 이벤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거여서 순위에 들지 못 한 채로 이벤트가 끝나면 나는 다시는 내 캐릭터에게 그 색깔의 옷을 입힐 수가 없게 된다고! 그래서 했다. 매일매일 개고생을 해서 나는 순위권에 들었다.
그 진절머리 나는 기억에 채팅창을 켰다. 우리 그때 그런 짓까지 했었잖아. 그걸 시작으로 채팅창 위에 우리가 했던 또 다른 뻘짓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전부 데이터로 이루어진 무언가를 얻어서 데이터상으로 강해지거나 멋져지기 위해 했던 짓들이었다. 하나같이 의미 없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아, 진짜 정말 의미 없고, 재미있었지. 무지 재미있었다. 재미가 없었으면 절대 그런 고생 안 했을 거다. 말로 다 표현 못 하게 재밌었다.
한동안 안 들어갔어도 오늘 다시 켜 본 게임 속 세상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그 배경음악만 들으면 나는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하던 때의 초보 전사로 돌아간다. 지금은 내가 못 깨는 던전 따위 존재하지 않지만 그때는 내 캐릭터가 너무 약해서 자꾸만 지고 죽고 실패했다. 어려운 사냥터는 꿈도 못 꿨었다. 그러다 하루는 보상 두 배 이벤트를 맞아 어떤 고수가 '버스'를 태워준다고 해서 친구랑 같이 냉큼 올라탔다.
그날 나 같은 애들 열 명이서도 못 잡을 몬스터를 그는 혼자서 다 잡고는 떨어진 보상을 쳐다도 안 보고 쿨하게 떠났다. 나와 친구는 감격에 젖었다. 우리도 꼭 저런 사람이 돼서 남들 태워주자.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잠결에 부계정을 뒤지다가 좋은 사냥터를 찾아내면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면 나처럼 비몽사몽 하던 애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잠보다 강화 재료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모은 재료로 강화해 낸 무기는 더 번쩍거렸다.
화면 속 모든 것에 이런 자질구레한 역사가 담겨 있다. 곧 사라질 이 공간에는 데이터만 있는 게 아니라 내 노력과 즐거움과 추억이 함께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면 나는 어느새 세상을 한 바퀴 다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내 캐릭터가 머무는 곳이다. 그는 바로 그 염색약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오랜만에 접속한 내게 인사를 건넨다. 그래, 안녕. 우리 곧 헤어져야 하는데 너는 그걸 알고 있을까. 나는 스크린샷 버튼을 눌러 오랜 친구의 사진을 남긴다.
언젠간 섭종할 게임을 참 열심히도 했다. 마치 언젠간 멀어질 사람과 열심히 어울리고 언젠간 끝날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처럼. 게임을 시작하던 때로 시간을 돌린대도 다시 이렇게 열심히 할까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그럴 거다. 이만큼 재밌을 걸 알고 있으니까. 언젠간 끝나고 말 다른 많은 것들도 나는 다 열심히 할 거고 무엇 하나 아까워하지 않을 거다. 영원하길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최선을 다해 즐겼다면 끝이 많이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