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짐을 정리하기 위해 그의 원룸을 찾았다.
관리사무소에서 마스터키를 받아 가던 우리는 그대로 멈춰섰다.
도어락 위에 비밀번호가 적혀있었다.
동생은 포스트잇에 비밀번호를 적어놓고 혹시나 떨어질까 걱정됐는지 스카치 테이프를 그 위에 여러겹 덧대놨다.
그는 죽음 뒤에 가족들이 이곳에 올걸 예상하고 비밀번호를 적어놨던 것이다.
동생의 집은 늘 지저분했다.
'그 나이때 남자들이 늘 그렇지' 라고 넘기기엔 정도가 좀 지나쳤다.
간혹 동생 집에 가면 온종일 집안 살림을 했다.
냉장고에는 정체불명의 음식들이 쌓여있었고, 방바닥은 끈적한 때가 가득해 몇번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혼자 사는 남자들의 평범한 집 풍경일 수 있지만,
더 화가나는 일은 집안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술병들이었다.
알콜중독 치료병원을 몇번이나 전전할 정도로 술에 빠져살았는데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도대체 넌 어쩜 이렇게 의지박약이니!" 가시돋힌 말을 참 많이 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현관 문을 연 순간, 믿을 수 없었다.
이불은 가지런히 침대위에 정리되어 있었고 수건은 차곡차곡 서랍에 개여있었다.
(도대체 죽기로 마음 먹은 애가 수건을 왜 죄다 빨아놓았던 건지)
음식물 쓰레기 조차 없었고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게다가 아무리 찾아봐도 술병은 전혀 없었다.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동생의 집이었다.
옛날에 어르신들이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웃곤 했는데 지금에야 알았다. 이 말은 지독하게 슬픈 언어였다.
동생은 언제부터 죽기로 결심한걸까
식탁 위에 동생의 수첩이 놓여 있었다.
그는 죽기 얼마전 부터 날짜별로 메모를 해놨다.
아마 남겨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남겨놓았을 것이다.
몇월 며칠 - 죽기에 좋은 곳을 찾으러 다녔다.
몇월 며칠 - 얼마 전 찜해놓은 그 곳은 생각해보니 별로였다. 더 좋은 곳을 발견했다.
몇월 며칠 - 오늘은 하루종일 집 정리를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기분이 좋다.
몇월 며칠 - 더 빠진게 없을까.
삶에서 기대했던 거의 모든 것을 마침내 얻게 되었을 때
베로니카는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매일매일이 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로 결심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中
도대체 너는 언제부터 죽기로 결심했던 거니!
스리랑카 누와라엘리아에 있는 '세상의 끝(World's end)'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