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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6. 2023

곁 : 우문애답

19






“Express physical love, hug the person next to you.”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세요, 곁에 있는 사람을 안아주세요)

- 트리아카스텔라의 바위에 쓰여 있던 글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에서 갈리시아 지방으로 넘어오면서 마치 계절이 바뀐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광활한 메세타 평원이 어느새 유칼립투스 향이 진동하는 숲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9월 중순에 시작된 까미노는 10월 10일을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길은 변함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있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노란색 화살표는 표지판, 비석, 누군가 만들어놓은 표식 등으로 형태만 달라진 채 계속해서 나타났고 순례자들 또한 지금껏 그래왔듯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산티아고까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니. 출발 전의 긴장감이 아직 다 날아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끝이 보여간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무리 산티아고 이후의 길까지 걸을 예정이라 한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까미노를 상징하는 마지막 도시가 가까워진다는 사실은 그토록 바라왔으면서 어느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되어 있었다. 까미노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길 위를 계속해서 걷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트리아카스텔라부터 사리아까지 약 18킬로미터. 출발하자마자 만나는 양갈래길에서 우리는 또다시 같은 길을 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어떤 바위에 “Express physical love, hug the person next to you(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세요, 곁에 있는 사람을 안아주세요).”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사랑이라. 까미노는 진정 사랑으로 충만한 길이다. 눈을 뜰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언제나 부엔 까미노를 비롯한 반가운 인사와 응원이 오간다. 매일 마주하는 대자연에서는 위대한 조물주의 사랑을, 인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미소 짓고 있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 먹고 마실 것이 충분치 않아도 기꺼이 나누고, 아픈 곳이라도 생기면 머지않아 걱정 어린 손길이 찾아온다. 아무런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동물들과 눈을 맞추기도 한다. 깊은 내면에서부터 가득 차오르는 삶에 대한 애정. 나이, 성별, 인종, 출신 그 어떤 차이점을 가진 누구라도 그 사람과의 포옹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설령 미울지라도. 길이 부리는 마법일까. 바위를 카메라에 담는 동안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사리아에서는 판타지 소설에나 있을 법한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었다. 진갈색으로 칠해진 외벽, 목재와 벽돌로 지어진 듯한 내부, 벽난로와 푸른 잔디가 깔린 작은 정원, 누군가의 보물창고처럼 보이는 100살은 되어 보이는 다락방까지. 다락방 창문 아래의 소파에는 우쿨렐레 하나가 놓여져 감성을 더해주었다. 25킬로미터나 30킬로미터에 비하면 사리아까지 18킬로미터는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였다 보니 샤워, 빨래, 짜파게티, 도착 후의 맥주까지 다 끝내고도 꿀 같은 낮잠을 즐길 여유가 있었다. 낮잠 후 저녁거리를 사러 장을 보러 나갔다. 참, 까미노가 사랑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바로 아주 저렴한 물가다. DIA(디아), FROIZ(프로이즈), GADIS(가디스) 등 어떤 마트에 가더라도 바게트, 와인, 소고기 가격은 뱃속의 위마저 웃음 짓게 만드니까.






“나 더 걸어야겠어.”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김민서는 놀랍고도 반가운 이야기를 했다. 난데없이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순례자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수수료를 내고 친한 지인의 결혼식 참석을 포기하면서 내린 결정이라며, 리스본까지 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포르투까지 만이라도 가야겠다고(산티아고 기준으로 포르투까지는 약 280킬로미터, 리스본까지는 600킬로미터의 거리다). 더 걷고 싶다던 그녀가 내 계획에 마음이 동하기라도 한 걸까.


기분 좋은 소식이었지만 이내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여섯갈래길의 다른 멤버들이 전부 떠나고 나면 산티아고에서부터는 나와 그녀 둘이서만 걸어야 한다. 커플이나 부부도 아니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성인 남녀가 단 둘이 몇 박 며칠을 아무 탈 없이 함께 보낼 수 있을까. 그동안 둘이서도 적지 않은 길을 걸어왔으니 못할 것은 아니겠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너무 잘됐다며 그럼 둘이 같이 가면 되겠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갑자기 따로 걷자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다만 그녀는 더 걷겠다는 결정에 앞서 이미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을 끝낸 모양이었다. 나는 내 계획대로 산티아고에서 포르투갈로 향하는 역방향 순례를 하라며, 본인은 포르투로 넘어가 다시 산티아고로 향하는 정방향 순례를 하겠다고 했다. 좋은 생각이라며 웃고 말았지만, 지도조차 없고 화살표조차 보이지 않는 미지의 길을 앞둔 느낌이 들었다.


사리아에서 머물렀던 알베르게




     

그날 저녁의 2층 다락방. 끝내주는 소고기 스테이크와 망해버린 간장계란밥으로 채워진 저녁 식사. 옆 테이블에는 네댓 명의 외국인 순례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생일을 맞이한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생일 축하 멜로디가 튀어나왔고 곧이어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축하의 노래를 불러댔다. 한국말로도, 영어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유럽의 말로도. 그들의 노래가 울려 퍼질 때쯤 나와 김민서는 다락방 옆으로 나 있는 작은 발코니에 나가 있었다. 레온에서처럼 사람 두어 명이 설 수 있는 조그마한 발코니였다. 둘만의 시간이 많이 자연스러워진 건지 레온에서의 발코니에 비하면 그녀의 존재는 새삼 편안해져 있었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생일축하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맥주를 마셨다. 별이 보였다. 폰세바돈이나 리냐레스처럼 쏟아지는 별들은 아니었지만 듬성듬성 보이는 별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별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맥주는 도대체 왜 맛있는지. 종종 이렇게 의미 없는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재미없기 일쑤였다. 쓸데없는 소리 취급 당하거나 논리적인 답변을 늘어놓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민서야,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그녀가 답을 건넸다.

“별은 예쁘려고 있는 거야.”


“민서야, 술은 왜 마시는 걸까?”

“좋으니까.”

“왜 좋은데?”

“그냥, 지금 좋잖아.”


우문애답이나 우문미답이라는 말이 있었던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대답은 나를 충만해지게 했다.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까미노에 더없이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약간은 놀란 눈치였지만 그녀 또한 나를 안아주었다. 트리아카스텔라의 아침에 만났던 바위와 그 위로 써진 문장에게 돌아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전해주고 싶었다.


@트리아카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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