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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6. 2023

답 : 가장 편한 마음으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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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하이킹을 할까? 나는 많은 하이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 《온 트레일스》, 로버트 무어



사리아는 산티아고까지 약 100킬로미터를 남긴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곳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인증서를 받기 위해서는 도보로 최소 100킬로미터 지점 전부터 걸어야 하기 때문에 사리아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순례자들이 확 늘어나 있었다. 까미노의 첫 출발지인 생장피에드포르가 떠오르는 분주함과 긴장감이 다시 길을 찾아왔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 분위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비가 오는 통에 많은 순례자들은 우비를 썼고 그들의 배낭은 주황색, 파란색, 연두색 등 형형색색의 방수 커버로 덮여 있었다. 운무가 낀 갈리시아의 진녹색 숲에서 순례자들이 반딧불이처럼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른 카페는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몸이 풀리는 동안 반대로 마음은 비 내리는 날씨처럼 먹먹해졌다. 그건 한 장의 엽서 때문이었다. 김민서는 레온에서 각자의 가족에게 보낸 엽서가 벌써 한국에 도착한 것 같다며, 그녀의 어머니께서 찍어 보내신 엽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괜찮다면 읽어도 되겠냐는 물음에 그녀는 쑥스러워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은 엄마 아빠, 태어나서 가장 편한 마음으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살고 있어."


작은 엽서 위로 가족을 향한 그리움, 길 위에서의 아픔, 자신을 향한 고뇌 등이 담겨 있었지만 나를 가장 먹먹하게 만든 것은 가장 편한 마음으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첫 문장이었다. 까미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고생스러운 길 위에서 어떻게 매일매일이 행복할 수 있는 걸까. 그 답이 그녀의 엽서에 적혀 있었다. 그건 내가 가장 편한 마음으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그녀의 엽서를 읽은 이후 새삼스럽게도 이 길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졌다. 공기 중에 맑은 기운이 둥둥 떠다녔다. 까미노가 800킬로미터가 아니라 8천 킬로미터, 8만 킬로미터까지 영겁의 세월처럼 뻗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가장 편한 마음으로, 태어나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지내는 내 모습을 영원히 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걸은 뒤로 며칠간 평소보다 약간 속도를 붙여 걸었던 터라 산티아고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길들은 이전보다 더욱더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천천히,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신발과 길이 맞닿는 소리는 아름다웠고 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긍정적인 감정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녀는 마음껏 천천히 걸으라며 먼저 길로 떠났다.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노란 화살표가 표지석의 형태로 가장 많이 나타났다. 회색 비석의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파란색 네모가, 네모 안으로는 까미노를 상징하는 가리비를 형상화한 노란색 표시가 그려져 있다. 비석 아랫부분에는 산티아고까지 몇 킬로미터 남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숫자가 쓰여 있다. 표지석에는 101킬로미터가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100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지석이 등장한다는 얘기였다. 100이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를 떠올려보았다. 100일, 100%, 100점처럼 삶에 깊이 들어온 숫자 중 하나가 100일 것이다. 꾸준히 지속되거나, 비로소 완성되거나, 완벽할 때 붙이는 숫자. 그래서인지 100킬로미터 표지석은 용서의 언덕이나 철의 십자가처럼 일종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다. 문득 그 표지석을 그녀와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디쯤 걷고 있을까. 최대한 천천히 걷겠다던 내 의지는 그녀를 향한 마음에 점차 힘을 잃어갔다.


“민서야!”

다행히 그녀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녀도 꽤나 천천히 걸은 듯했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심 그녀도 나와 같이 보고 싶어 했기를 바랐다. 우리는 100킬로미터 표지석 앞에 함께 섰다. 그동안의 깨끗한 표지석과는 달리 100킬로미터 표지석에는 온갖 흔적이 가득했다. 이 지점을 지나친 수많은 순례자들의 마음이 묻어 있을 터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800킬로미터의 길이 고작 100킬로미터를 남겨놓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원섭섭하다는 정도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몇 개월 전부터 마음속으로 그려온 산티아고가 겨우 100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100이라는 숫자가 이제는 너무나 작게 또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리 몇 마리와 소 떼가 조용히 표지석 앞을 지나갔다.



그녀의 출국 일정이 확정되었다. 그녀는 11월 5일에 유럽을 떠난다. 길 위에서 2주 정도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의 어떤 점이 그녀에게 끊임없는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그 답 또한 그녀가 쓴 엽서의 첫 문장에 있으리라. 걷는 내내 그녀의 얼굴에는 한층 여유로워진 표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떨어져서 걷든, 같이 걷든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다는 점에서 나도 기뻤다. 설령 따로 걷는다 해도 같은 길 위에 있다면 포르투갈 어디에선가 한 번은 보게 되지 않을까. 잠시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왜 그녀와 함께 100킬로미터 표지석을 보고 싶어진 것이었을까. 여행지에서는 누군가와 3일만 같이 지내도 마치 1년을 알고 지낸 것 같은 관계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까미노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여행보다 더 진한 느낌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2주 전이었고, 같이 걸어본지는 기껏해야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결코 적지 않은 시간 속에 그녀의 존재는 나와 함께였다. 시간과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이후 우리는 걷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고, 대화하고, 느끼는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마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의 느낌과 많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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