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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7. 2023

나와 너 : 배반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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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스페인 순례자 세 명이 입을 모아 추천해준 식당이라면, 누구라도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까미노에는 당연히 스페인 순례자들도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올레길 가는 느낌이려나). 갈리시아는 폰페라다에서 이미 맛 본 적 있던 문어요리 ‘뽈뽀’의 본고장으로 인식되는 지역인데, 멜리데에 있는 Pulperia Ezequiel이라는 식당은 갈리시아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맛집이라 했다. 가게는 현지인들과 순례자들로 뒤섞여 여느 곳의 맛집이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거려 소란스러웠다. 폰페라다에서는 꽤나 실망스러웠던 뽈뽀가 그토록 맛있는 음식일 줄이야. 스페인 최고의 뽈뽀를 맛 본 우리는 햇빛 쨍쨍한 대낮부터 와인 두 병을 하얀 사발에 담아 잔뜩 들이키고는 저항할 새도 없이 취해버렸다. 맛집의 조건이 신선한 재료, 친절한 서비스, 매장의 분위기, 가장 중요한 맛, 그리고 맛을 뛰어넘는 동행이라면 그 상황은 내게 아마도 지나치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탱탱한 문어, 점원의 미소, 왁자지껄한 분위기,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과 올리브 오일과 파프리카 가루가 섞인 중독성 있는 맛, 그리고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까지.


와인을 막걸리처럼 마셔보자


다음 마을인 아르주아까지는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정신을 부여잡고 ‘취중 순례’라는 걸 해보기로 했지만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운 날씨와 올라오는 술기운 앞에서 나아가야 할 길은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연박이 까미노의 휴가였다면, 낮술은 일탈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어이없는 웃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채 반 쯤 정신을 놓고는 깔깔거리며 걸었다. 더 이상은 무리겠다 싶은 순간, 숲길 왼편으로 정돈되지 않은 널따란 풀밭이 나타났다.


"우리 저기서 명상이라도 하다 갈래?”

“그럴까?”


근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 제안이 또 다시 그녀 앞에서 얌전히 받아들여졌다. 야생의 풀밭 위로 싸구려 우의 두 개를 깔아두고, 커다란 배낭을 베개삼아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해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안는 듯했다. 살랑거리는 나뭇잎과 천천히 유영하는 구름이 보이고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렸다. 온 숲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흥분감 속에서 잠이 찾아왔다.


깊고도 얕았으며, 얕고도 깊은 잠이었다. 눈을 떴을 때 여기가 어딘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오른쪽 어깨로 불어오는 반복되는 따뜻한 콧바람이 조용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민트 향기






지난 밤 우리는 간신히 몇 킬로미터쯤 더 걸어 아주 작은 마을 보엔떼라는 곳에서 여섯갈래길 없이 둘만 머물렀다. 걷기 시작한 지 33일차가 되었다. 이제 이틀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만큼 감성적인 말이 또 있을까. 길에 적응했다기보다는 동화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한 달을 넘게 걸어 온 일상이 끝난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길이 내 기분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기쁜 사실은 무겁고 울적한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오 페드로우조로 향하는 28킬로미터의 어디에선가 만난 낙서 가득한 터널 안에서 우리는 그 마음을 남겨두었다.


'내일이 오는 것이 좋지 않을 수도 있구나.'







오 페드로우조에서 약 1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있는 곳에는 독특한 가게 하나가 있었다. 수 천 개의 갈색 맥주병이 벽에 꽂혀 있거나,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테이블에 쌓여 있는 곳. 그간 스페인에서 흔히 마셔오던 맥주 브랜드가 아닌 ‘PEREGRINA(순례자)’라는 처음 보는 맥주였다. 그리고 맥주병 하나마다 이 곳을 지나간 모든 이들의 이야기 하나가 하얀 백묵으로 쓰여져 있었다. 가게 전체가 순례자들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진정 순례자를 위한, 순례자에 의한, 순례자의 공간이구나. 산티아고를 하루 앞둔 시점에 이보다 낭만적인 곳이 또 있을까.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간 곳에서 우리도 맥주 한 병과 백묵을 손에 쥐었다. 어떤 글을 적으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우리는 서로 나누었던 지난 대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적기로 했다.


무언가 이상한 순간이었다. 홀로 떠나와 장장 800킬로미터라는 기나긴 길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는 사실이 배반의 장미처럼 느껴졌다. 까미노는 내가 생각하던 길과는 그 결이 이미 한참은 달라져 있었다. 《여행의 이유》 초반부에는 여행에 대해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쓰여있다. 오롯이 나를 위해 떠나온 만리타국의 길,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명의 여인. 어쩌면 나의 길은 오래 전에 끝났고 우리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곁에서 나는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 곁에서도 나는 오롯이 나일 수 있었고, 그녀는 나의 모든 모습을 받아들여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녀 곁에서 나는 철저하게 행복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맥주병에 쓰여진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그 순간에 나는 어렴풋이 느낀 것 같았다. 알렉산더가 남긴 최후의 문장을 그녀가 다시 씀으로써 내가 제시의 길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걸, 그녀의 곁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아직도 걸려 있을까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한 명의 순례자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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