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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9. 2023

길Ⅱ : 낯선 땅 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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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둘러싼 서술어들, 가령 '끌린다, 꽂힌다, 빠진다' 와 같은 단어는 '나'보다 '사랑'이 더 세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사랑'에 매번 진다.

그래, 그래, 내가 지고 있는 동안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동안이다.”

- 《사랑하기 좋은 책》, 김행숙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와 팔짱을 끼고 둘만의 사진을 찍었을 때에도 내 머릿속은 어느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황홀한 불행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앞세운 채 불행한 황홀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며칠간 이어져 온 고민을 질질 끌고 있는 나 자신이 머저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이 뒤바뀔지도 모르는 결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우리가 가까워졌다한들, 그녀 역시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한들, 그 모든 게 나 혼자만의 상상이거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도 괜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반복되길 여러 번. 상대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같은 이유로 고백이라는 건 언제나 양날의 검이 되고 만다.


파티가 끝난 뒤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김민서, 류성민과 함께 숙소 테라스에서 맥주와 안주를 깔아 두고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여정의 끝을 기념하는 한 잔 두 잔의 술에 얼근하게 취한 채 나와 그녀는 서로에게 기대다시피 앉아 있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류성민은 우리를 반쯤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별안간 ‘두 분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라고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처럼 둘만 남게 되었고 잔잔한 대화가 이어졌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다 떨어진 맥주를 더 가져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손쓸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입술은 그녀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숨결에서 풍겨지는 달큰한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아마도 내 동공은 그 이상으로 커질 수 없을만큼 커져 있었으리라. 동시에 정신은 끝없이 아득해져 머나먼 우주 한 가운데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의 찰나가 지나갔을까. 뜬 눈 사이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우리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강을 건넜구나. 물살이 몰아치는 강을 앞두고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를 이끌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린 하우스의 테라스






다음 날 아침, 얼떨떨한 상태로 눈을 떴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누워 백색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행길에서의 로맨스를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이 실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덴마크 순례자 마리의 말처럼 그런 일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물론 여행 중에 연인이 되었다는 몇몇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다른 세상의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심지어 남루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걷기만 하는 이런 여행길에서 누군가와의 사랑이 시작되다니. 지난밤에 있었던 일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러웠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길을 목전에 두었을 때처럼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다만 술 마신 다음 날의 아침이 으레 그렇듯, 감정보다는 이성이 더 기민하게 반응했다. 설렘보다는 가까운 혹은 먼 미래의 언젠가 우리가 함께한 모든 길들이 무의미해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우리는 포르투갈의 땅도 함께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몇 개월은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곧 다가올 오로지 둘만 걷게 될 길 위에서,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각자 보낼 일상의 길 위에서 우리는 끝까지 함께 서 있을 수 있을까. 많은 연인들 앞에 놓이는 숱한 난관들을 헤쳐나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선택한 길의 끝에는 후회와 공허함이 남아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800킬로미터의 길이 끝난 산티아고에서 막 연애를 시작한 두 남녀의 첫 아침이 시작되었다모두가 둘러앉아 먹는 아침의 라면 면발 틈새로 서로만 아는 비밀스러운 사실, 기분 좋은 어색함, 낯설면서도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멋쩍게 느껴지는 상대의 모습과 그 모습이 담긴 갈 길 잃은 눈동자는 그날의 할 일 앞에서 조금씩 정돈되어 갔다. 날씨는 맑았다. 우리는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프랑스길의 완주증과 포르투갈길의 도장이 찍혀나갈 새 크리덴시알을 받았다. 새로운 순례자 여권에서 느껴지는 빳빳한 질감이 완주증에 묻어있는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산티아고에서는 여섯갈래길 모두와 함께 2박 3일의 일정이 계획되어 있었다. 한 달을 넘게 상상해 온 도시를 하룻밤만에 떠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어려웠고 마음이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숙소를 옮긴 후 멤버들과 시내에 나가기로 했을 때 우리는 포르투갈길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는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그들은 우리가 따로 걸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첫 데이트라면 데이트. 각자 간직해 온 속마음들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함께 기억하는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하고, 실없이 웃다가 말없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KFC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코울슬로 드레싱을 곁들인 치킨을 먹고 데카트론(Decathlon, 유럽권에서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포르투갈에서의 새로운 길을 위한 재정비를 했다. 대성당의 꼭대기가 보이는 역사 깊은 도시의 활기찬 거리를 감각하는 동안 얼떨떨한 감정도 조금씩 풀어져 갔다. 빈자리로 설레는 마음이 들어와 점점 부풀어져 갔고 후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길이 끝났고

강을 건너 도착한 낯선 땅 위에서 다시 길 하나가 시작되었다.

그래, 사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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