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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단 Sep 06. 2023

꽃 : 두 세계관의 충돌

21






“그날들은 꽃무더기로 맞는 것처럼 아팠었다.
하루도 꽃앓이를 하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로 몸과 마음에서는 꽃잎 부서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 병이라면 영원히 앓고 싶었다.”

- 《사랑 그리고 꽃들의 자살》, 이세벽



우리도 아침 먹을 시간이다


포르토마린은 까미노의 산토리니라는 별명답게 하얗고 예쁘게 다듬어진 작은 마을로, 우리가 머무른 알베르게 역시 전날의 사리아처럼 고풍스러운 맛은 없었지만 휴양도시 중심가에 있는 신식 호스텔처럼 깨끗했고 현대적이었다. 모두가 출발하고 고요해진 알베르게에서 나와 김민서는 어묵탕 국물에 설익은 밥을 말아먹고는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엔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고 제법 쌀쌀했다. 여러 명이 있는 무리에서 어떤 남녀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면 으레 그렇듯 이제는 가끔씩 함께하던 박영민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쯤 되자 둘만 남은 상황이 자연스러움을 넘어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출발한 지 2킬로미터쯤 지났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길 옆의 둔덕에 올라가 명상을 해보자고 했을 때 그녀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어떤 제안을 해도 언제나 “그럴까?”라며 함께했다.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가볍게 여긴 적 없었다. 그 어떤 대화 주제를 꺼내도 진지하게 임해주었다. 아아, 그녀는 너무 좋은 사람이다.


잠시 길을 벗어나 언덕처럼 보이는 들판에 올라가 우의를 깔고 앉았다. 나무 한 그루를 그늘 삼아 나란히 앉은 채 명상하기에 좋을 음악을 골라 틀었다(휴대폰의 플레이리스트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Brian Crain의 Light In The Window였다). 매일 걸으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까미노에서 굳이 명상이라는 게 필요할까 싶었지만 한 번쯤은 이 땅에 깃든 신의 마음이라는 걸 혹은 내 마음이라는 걸 더 깊게 느껴보고 싶었다. 그건 마치 《순례자》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경험한 일종의 ‘씨앗훈련’ 같은 것이었다. 모든 긴장을 풀고 천천히 호흡하며 몸을 웅크린 채 안락한 대지가 품은 맑은 씨앗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몸에 힘을 뺀 채로 감미롭게 느껴지는 길 위의 순간에 몸을 내맡겨보았다. 3분 20초짜리 피아노곡이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 눈을 뜨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리시아의 초록을 배경삼은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고요히 감겨 있는 눈, 불규칙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편안하게 포개진 입술. 고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명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포르토마린 전경






다음 마을인 팔라스 데 레이에서 모두가 잠든 밤, 우리 둘은 알베르게 거실 구석에 놓인 검붉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때 어떤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순히 나란히 앉아있다고 하기에 우리의 몸은 고개를 돌리면 코 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마저 알베르게를 가득 채울 것처럼 느껴지는 좁혀진 거리 안에서 나는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다양한 선택지, 이를테면 그녀의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어떤 감탄사를 쓸 것인지, 표정은 어떻게 지을 것인지, 다음 이야기로는 어떤 게 자연스러울지와 같은 것들 중 하나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고 몸은 본능적으로 모든 감각을 최대한 개방한 것처럼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남녀 간의 어떤 불꽃이 튀기라도 한다면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장면들이 재생되었다.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 서로에게 고작 하루가 채 안 되는 시간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쉴 새 없는 대화의 끝에서 결국 사랑의 감정에 거역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 마리의 말처럼 그 이야기는 영화일 뿐이겠지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조금씩 제시와 비슷해져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영화 <인투 더 와일드>의 알렉산더 슈퍼트램프가 등장했다. 모든 걸 내던지고 떠난 여행에서 그는 트레이시라는 매력적인 여자(배역이 무려 크리스틴 스튜어트다)를 만나지만 감정의 유혹을 뿌리치고 헤어짐을 택하고 자신의 여행을 계속한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아마 이 두 영화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신념과 제시의 감정이 공존했다. 현실을 내려놓은 채 1년간 세계여행을 해보겠다고 떠나왔고 그 여행이 시작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 넘었을 뿐이었다. 앞으로 11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판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어떤 공식적인 관계에 접어들게 된다면 그건 앞으로의 내 여행에서도, 돌아간 그녀의 일상에서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가 될 것이다.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까미노에서 함께 보낸 추억마저 부질없는 기억으로 남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이 가까워져 있었고,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한 줌의 여백조차 없이 즐거웠다.


제시와 알렉산더가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시의 길에서 나는 그녀를 점점 마음 깊이 좋아하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길에서는 오랜 시간 품어 온 긴 여행이 아른거렸다. 두 세계관의 강력한 충돌. 어느 길로 가야 하는 걸까.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 걸까. 답을 알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 년 전 김대규 시인의 《사랑의 팡세》에서 본 시 하나가 떠올랐다.

 

가장 황홀한 불행은

사랑에 미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황홀은

학문에 미치는 것이다.


아마도 내 머릿속 ‘학문’ 자리에는 ‘여행’이 대신 끼워져 있었을 것이다.


가장 황홀한 불행은

사랑에 미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황홀은

여행에 미치는 것이다.


천국은 어느 길의 끝에 있을까.



그날 밤 불꽃은 튀지 않았다.


날것처럼 요동치던 감정의 끝,

각자의 침대로 돌아간 시간에 나는 몰래 안도했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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